힙합에서 찾은 여성리더십, 재키와이와 다양성

남성 중심의 질서에서 언프리티 랩스타로 살아남기

by 주드



사람은 떠나야 할 때를 알아야 한다고 한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내 끝이 보였다. 회사에서 성공가도를 달리지 못할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회사에서 잘, 오래 살아남으려면 내가 못하는 것들을 잘해야 했다. 능력적인 부분은 차치하더라도 생활 자체가 나와 맞지 않았다. 회사에서 눈칫밥을 먹어가며 관찰한 결과 사회생활의 암묵적인 룰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것에 순응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회사에서는 선배의 의견에 따라야 했다. 납득이 되지 않는 일에도 순응해야 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경험 부족으로 내 의견이 틀려서 일수도 있고, 내 의견이 맞더라도 설득하기 위한 보고 과정이 길어진다. 그리고 아무리 토를 달아도 결국엔 선배 의견대로 하게 되어 있었다. 예스맨이 되는 것이 빠르고 속 편했다. 이게 바로 ‘까라면 까’였다.


이 외에도 여러 집단행동들이 있다. 무더운 여름날, 비가 오는 날, 볼이 떨어져 갈듯 추운 날에도 같이 담배를 다 함께 피우러 나간다. 심지어 비흡연자도 담배를 피우러 같이 나간다. 그리고 같이 저녁을 같이 먹고 같이 야근한다. 술을 잘 마시거나 술을 잘 못 마시더라도 술자리를 오래 지키고 있으면 좋다. 그리고 이런 날은 적지 않다. 이런 과정에서 정보교류, 네트워킹, 속마음 토크 등이 이루어지고 전우애가 형성된다.


지금까지 열거한 암묵적인 룰은 남자들의 문법이다. 흡연자의 비율도 남자가 여자보다 월등히 많다. 주변을 보면 남자들이 여자들에 비해 무조건적인 순응을 잘하는 것 같다. 나를 비롯한 여자들은 동의하지 못하는 것에 의견을 상대적으로 잘 낸다. 결국 남자들이 여자들에 비해 ‘조직생활’이라는 것을 잘 해낼 가능성이 많다. 군대에서 주로 이렇게 지낸다고 들었다. 한번 학습해서인지, 성향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물론 모든 남자들의 룰은 아니다. 회사 생활을 잘한다고 여겨지는, 주류를 이루고 있는 남자들의 것이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이 문법은 아직까지도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회사를 세 군데 다녀본 경험에 비춰봤을 때 그렇다. 조직의 특성상 상급자에 의해 조직문화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은데 아직까지 대부분의 조직의 상급자는 남성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자들의 문법이 조직의 룰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여성 임원들도 많이 생기고 있기는 하지만 분위기가 피부에 와 닿게 바뀌려면 아직도 한참은 있어야 할 것 같다. 결국 여기에 누가 잘 적응하는 것이 관건이다.


원래도 호락호락한 성격이 아닌 데다가 성별이 여자인 나는 이런 룰들에 익숙해질 능력이 없었다. 상하관계가 명확한 회사에서 수직적인 질서를 따르는 것이 어려웠다. 그 질서 안에서 내 위치를 현실 직시하며 자연스레 흡수돼야 했다. 이는 난이도가 보통 높은 것이 아니었다. 타고나지 않는 이상 뼈를 깎는 노력으로도 힘들 것 같았다. 나는 남성과 여성의 성향 차이가 있다고 믿는다. 여자로서 남자의 룰에 적응하려면 정신개조에 가까운 변화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여자 선배들이 회사에서 살아남는 법을 관찰하기로 했다.


회사에서 본 여자 선배들은 둘로 나뉘었다. '사회생활을 잘하고 인정받는 선배'와 '그냥 회사를 다니는 선배'였다. 인정받는 여자 선배들은 능력이 아주 뛰어나거나 남자들의 룰에 어느 정도 따르는 것처럼 보였다. 목소리도 크고, 야근도 마다하지 않는다. 술자리도 피하지 않으며 그곳에서 당당했다. 담배는 피우지 않더라도 나름대로의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다. 남자 상사들에게 할 말을 하는데 좀 더 유하고 영리하게 했다. 줏대 있고 똑똑하고 커뮤니케이션을 잘하는 것이 그분들의 장점이었다.


결론적으로 여자로서 회사에서 잘 나가려면 남자들의 방식에 여성성을 접목해야 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쉬운 길은 아니었다. 이런 어려운 문법을 앞에 두고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내가 알고 있는 여자 선배들의 모습에 나를 대입시켜봤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그냥 회사를 다니는 선배 1인’이 될 것 같았다. 업무를 뛰어나게 잘하려고 노력하는 성격도 아니고 사회생활을 잘해 시류에 합세할 타입도 아니었다. 이도 저도 아닌 나는 끝을 알아야 했다. 그리고 언젠가 집으로 돌아갈 운명이라고 여겼다.


힙합을 좋아하다 보니 실제로 랩을 배운 적이 있다. 시작은 벤치마킹이었다. 랩 연습을 하기 위해 여성 래퍼의 곡을 찾기로 했다. 트렌디하면서도 나와 비슷한 목소리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마땅한 여성 래퍼가 없었다. 자이언트 핑크는 내 목소리에 비해 목소리가 굵고 허스키했다. 슬릭도 나와 맞지 않았다. 한 손가락뿐인 선택지를 다 털어버리니 더 이상 없었다. 남은 것은 결국 윤미래였다. 결국엔 윤미래의 '검은 행복'(2007)을 연습곡으로 택했다. 윤미래는 한국 힙합에서 전설적인 여성 래퍼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뻔한 결론이었다. 너무 많이 불러 노래방 금지곡이 됐다는 임재범의 '고해'와 다름없을 것 같아 피하려고 했지만 끝끝내 피할 수 없었다. 한국 힙합에는 내가 롤모델로 삼을만한 여성 래퍼가 없었다.


시작 단계에서는 보통 롤모델을 정한다. 그리고 그 선배를 보며 청사진을 그려 나가기 시작한다. 막혔을 때도 다른 선배나 주변을 보고 벤치마킹 아이디어를 얻는다. 취미로 하는 내가 이렇게 막막한데 랩을 직업으로 삼는 여성 래퍼들은 얼마나 더 다양한 상황에서 여러 모로 막막했을까. 힙합에서는 대부분의 래퍼들이 남자고 여성 래퍼들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특히 형님 격인 래퍼들은 99.9% 남자다. 심지어 팬들도 남자가 많다. 이런 힙합씬에서 여성 래퍼들은 어떤 존재일까. 과장 이상의 직급이 대부분이 남자인 회사를 다니고 있는 여자 주니어인 나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그동안 한국 힙합에서 여성 래퍼들은 정통 랩으로 승부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남자의 문법이었다. 랩은 생물학적으로 흑인 남자들로부터 시작했다. 성공한 흑인 여성 래퍼의 수도 적은 힙합씬에서 여성, 특히 한국 여성으로서 정통 랩을 소화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윤미래 같은 유일무이한 여성 래퍼가 나왔다. 윤미래는 '여자도 잘할 수 있구나.'라는 희망도 줬다. 그러나 항상 비교가 되는, 뛰어넘어야 되는 벽도 됐다. 여성 래퍼가 등장하면 항상 윤미래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벽을 뛰어넘은 여성 래퍼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요즘 힙합씬에서 새로운 유형의 여성 래퍼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재키와이는 윤미래처럼 붐뱁 비트 위에서 놀려고 하지 않는다. 기계음과 혼연일체가 됐다. 통이 넓은 바지도, 레게 머리도 하지 않는다. 핑크색, 노란색, 회색 등 다양한 색을 머리카락이 바스러질 때까지 머리에 얹었다. 양갈래 삐삐머리에 치마 또한 기존의 힙합 가수로 보기는 어렵다. 확실히 재키와이에서는 윤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재키와이는 재키와이의 모습과 방식으로 성공했다.


이 외에도 스월비, 릴체리 등 다양한 개성의 여성 래퍼들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여기에는 다들 각자의 모습이 있다. 이들의 등장에는 멈블랩, 싱잉랩 등이 있다. 이것들은 기존의 힙합 문법에서 벗어난, 힙합 같지도 않다고 여겨지던 힙합이다. 이것들이 최근 멋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황이다. 요즘의 여성 래퍼는 다양성이 받아들여지는 토양에서 나온 귀한 열매들이다.


윤미래의 길을 가지 않은 여성 래퍼들에서 내 길과 내 모습을 상상한다. 남성성을 이상향으로 두고 여자인 나를 맞추는 모습을 지워본다. 그리고 나라는 새로운 모델을 그린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면서 나만이 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내는 것, 나만이 쓸 수 있는 기획안과 보고서를 쓰는 것, 나만이 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제안하는 것이다. 회사에 나를 맞추기보다 내 색깔을 지키면서 회사가 원하는 것과 타협한다는 태도, 그것이 나를 출근하게 하는 힘이 될 것 같다. '90년 생이 온다'를 돌려 읽고 밀레니얼 세대의 사내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은 다양성의 토양이 아닐까 도박처럼 기대해본다. 회사에 좀 더 오래 내 자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있을 그곳에는 여자도 없고 남자도 없다. '나'만 있을 뿐이다. 나는 오늘도 힙합에서 배운다.



* 퇴사하고 카카오 이모티콘을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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