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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드 Dec 31. 2020

에밀리의 먹방

넷플릭스 오리지널 <에밀리 파리에 가다> 리뷰

지금은 한풀 꺾였지만 먹방은 한때 열풍이었다. 나 또한 먹방을 열심히 보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먹방 유튜버들이 엽기떡볶이나 교촌치킨 같은 배달 음식을 카메라 코앞에 두고 먹는 모습이 어찌나 맛있어 보이던지. 맛있게 매운맛이 상상되는 떡볶이 떡 서너 개씩을 큰 숟가락에 올려 후루룩 넘기는 사람이 나였으면 했다. 그렇게 먹방 영상을 보며 부질없는 상상을 하곤 했었다.


사실 내가 먹방을 보던 시기는 주로 다이어트를 할 때였다. 주로 운동을 마치고 침대에 누워서 봤다. 배가 무척 고팠다. 당시에는 저녁을 닭가슴살 샐러드나 고구마로 때운 뒤 곧바로 운동을 했다. 그러면 그 얼마 안 되는 음식들이 일부는 근육으로 내 몸 어딘가에 자리 잡고 일부는 체지방으로 연소됐다. 그리고 위가 비었다는 것이 몸소 느껴질 시간이 바로 밤 10시 반에서 11시다. 텅 비어서 위액만 남아 배가 쓰라렸다. 그 배가 신기하게도 먹방을 보면 절로 채워지는 듯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먹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먹방은 내 주린 배를 채워 주는 그림의 떡, 영광굴비였다.


넷플릭스 드라마 <에밀리 파리에 가다> 또한 내게 먹방 같은 존재다. 주인공 에밀리의 삶은 대체로 부럽다. 그녀는 시카고에 사는 마케터로 20대의 어린 나이에 파리 주재원으로 파견된다. 파리 동료들에게 미움을 받기는 하지만 하는 일마다 술술 잘 풀린다. 그녀는 매일 아침 고풍스러운 유럽풍 건물들 사이에서 에어팟으로 음악을 들으며 조깅한다. 10시 30분 출근이라 누릴 수 있는 호사다. 옷도 예쁜 옷만 입는다. 또한 뷰가 무척 좋은 숙소에 사는데 집세도 회사에서 내준다. 게다가 아래층에는 이름마저 브라보인 훈남 요리사가 산다. 에밀리를 좋아하는 남자들도 많다. 오죽하면 이 드라마의 제목을 '파리의 남자들은 에밀리를 좋아해'로 바꿔야 한다는 말도 들었다. 우연히 만난 친구는 알고 보니 중국의 갑부다. 회사에서는 내는 아이디어마다 받아들여지고 대박이 난다. 에밀리의 삶은 내 이상향들이 총집합된 삶이다.


<에밀리 파리에 가다>를 보는 순간에는 내가 그 현실에 있는 것만 같다. 그리고 이것이 더 달콤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내 현실이 시궁창이기 때문일까. 나는 서울에서 아침에 조깅을 하기에 촉박한 시간에 출근을 한다. 그리고 출근길에는 빡빡한 지옥철에 몸을 욱여넣어 실려가듯 한다. 화가 나서 오전 11시부터 와인을 마시러 가는 에밀리와 달리 점심은 빨리 먹으러 가도 될지, 칼퇴를 해도 되는지 눈치를 봐야 하는 쪼렙의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회사에서 마음대로 아이디어를 낼 수도 없고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이런 뿌연 삶에 코로나 시국까지 더해져 답답한 삶이다. 이런 삶에서 4K 화면으로 깨끗하게 보이는 파리 시내의 전경, 반짝이는 에펠탑과 더욱더 반짝이는 에밀리의 삶은 더더욱 내 눈과 마음을 씻어 준다.


에밀리의 삶에 내 삶을 빗대어 보며 행복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삶을 살고 있는 누군가를 보며 내가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들을 세워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좋은 풍경에서 아침에 조깅을 하고 싶구나. 10시 30분이 내가 원하는 출근 시간이겠구나. 나는 내가 일은 하기 싫어하는 줄 알았지만 에밀리가 일로 성공하는 모습을 부러워 하는 것을 보니 나도 일 욕심이 있구나.' 에밀리의 삶에서 내 삶을 찾아본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렷해진다. <에밀리 파리에 가다>는 행복에 대한 현재 진단이다. 


미국인들은 일하기 위해 살잖아요. 우린 살기 위해 일해요.
돈을 버는 것도 좋지만 그쪽 기준의 성공이 우리 기준으론 고문이에요.

<에밀리 파리에 가다>가 행복에 대한 드라마라고 생각하게 된 이유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내가 생각해보지 못했던 행복의 지점들을 프랑스인들의 가치관을 통해 확장할 수 있다. 다 잘되는 에밀리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프랑스 직원들의 텃새였는데 그들의 이유는 명확했다. 동시에 신박했다. 에밀리가 오면서 그들이 일을 더 많이 하게 될까 봐 그녀를 싫어했던 것이다. 회사가 미국으로 인수되어 빡세게 일하는 미국인들의 문화가 널널하게 일하는 프랑스의 문화를 잡아먹을까 걱정이었던 것이다. 근본적으로 일을 행복의 조건에 넣는지 안 넣는지 그 가치관의 차이가 가져온 갈등이었다. 나는 일을 행복의 조건에 넣는 에밀리와 비슷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프랑스인들의 여유에 덩달아 나도 여유로워졌다.


남을 온전히 소유할 생각도 남에게 온전히 소유될 생각도 없어요.
어차피 연애도, 결혼도 그걸 보장하진 않으니까. 그런 건 동화에 불과해요.

사랑에 대한 프랑스인의 가치관도 <에밀리 파리에 가다>에서 흥미롭게 볼 수 있는 지점이다. 공공연한 내연 관계가 버젓이 나온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림이다. 내연의 당사자는 심지어 그 생활에 만족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남을 온전히 소유할 생각도 남에게 온전히 소유될 생각도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결혼만이 사랑의 감정을 완성하는 화룡점정인가. 프랑스인들은 아니라고 말한다. 프랑스인들의 행복과 자유에 대한 여유로운 가치관에 절로 리스펙트를 보내게 된다.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을 하고 그것이 행복일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내 편견이 조금씩 녹아내린다.


이렇게 나는 방구석에서 에밀리를 부러워하며 <에밀리 파리에 가다>를 먹방 삼아 보고 있다. 그러면서 한켠에 행복을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행복은 무엇인가. 프랑스인들에게 행복은 무엇일까. 나와 다른 행복의 기준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을 보며 내 행복의 저변을 점차 넓혀 나간다. 신기하게도 주린 배가 채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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