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온도와 습도
2022년 12월, 존박은 싱글 ‘Love again’을 발매했다. 수록곡 두 곡 모두 존박이 작사, 작곡했다. 먼저 타이틀곡 <Love again>을 듣고 미소가 지어졌다. 최고의 기쁨을 표현한 그 온도에 대한 공감이었다. 당시 그는 결혼으로 최고로 행복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는데 신이 나서 방방 뜨는 노래가 아니었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 나도 제일 기쁠 때 요란하기보다는 이 정도 은은함으로 표현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온도가 맞아서 참 좋았다. 다른 수록곡 <Save Our Christmas>를 듣고는 더 흐뭇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재지하면서 칠한 음악이라 분명 호불호가 갈릴 음악이었다. 하지만 내 취향에는 정말 극호였다. 나를 다른 사람과 구별 지어주는 음악이었던 것이다. 이번 싱글도 완벽히 취향 저격당했다.
늘 음악에 온도와 습도가 있다고 생각해 왔다. 감성이 많이 들어가고 감정 표현이 크게 된 음악은 온도가 높고 촉촉하다고 느껴진다. 특히 이별노래에서 두드러진다. 2000년대 유행했던 버즈, SG워너비, 윤민수, 그 외에도 선우정아 등이다. 이들의 노래는 사운드적으로나 가사적으로 울부짖고 감정을 토로하는 경우가 많다. 모두 좋은 노래다. 특히 선우정아의 <도망가자>는 노래방에서 베프들이 합창을 할 정도로 좋아한다. 기호의 영역으로 넘기면 내 취향은 아니다.
반대로 상대적으로 건조하고 메마른 노래들이 있다. 극한의 슬픔인 이별상황에서도 그렇다. 이소라 <바람이 분다>, 카모 <그대에게>, 폴블랑코 <Summer>, 공일오비, 심규선 <어디선가 나의 노랠 듣고 있을 너에게> 같은 노래들이다. 가사가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슬프다. 담담하고 담백하게 불러서 더 슬프다. 밝은 노래도 다소 잔잔한 parcels, emotional oranges 같은 음악을 좋아한다. 신나는 힙합이나 누 디스코, 펑크 외에는 이런 기복 없는 노래들이 더 플레이리스트에 많다. 더 내 온도와 습도에 맞아서 그렇다.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
이소라, <바람이 분다>
뜨겁고 촉촉한 노래를 제쳤다고 끝이 아니다. 나는 건조의 세계를 한번 더 거른다. 그냥 건조와 상건조가 있다. 예를 들어, 내 기준 곽진언은 상건조이다. 감정기복 없이 일정한 느낌이라 노래를 듣는 느낌이 안 나기도 한다. 그의 노래를 들으면 나같이 감정 동요를 기피하는 사람도 어느 정도의 감정 동요를 찾게 된다. 곽진언 덕분에 내가 감정을 느끼기 위해 노래를 듣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의 노래를 즐겨 듣지는 않는다.
물론 곽진언 역시 훌륭한 가수다. 좋아하는 노래 중 하나인 <일종의 고백>은 곽진언의 버전을 가장 좋아한다.
아무튼 음악을 오래 듣다 보니 음악의 촉촉 건조함의 세계관을 나름대로 만들게 됐다. 기준을 가지고 취향을 파악한 나인데 이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것이 바로 존박이다. 그의 음악은 기쁠 때도 크게 기쁘지 않고 슬플 때도 크게 슬프지 않다. 그의 음색이 워낙 중저음이기도 하고 사운드나 가사에 감정이 과잉돼 있지도 않다. 존박이 연애를 끝내고 낸 것 같은 EP 'outbox'도 절제된 슬픔이 녹아 있다. 최근 제일 좋아했던 앨범이다. 사운드는 슬픈데 가사는 긍정적이다. 착하고 미묘하다. 그래서 매력 있다.
그대 없는 하루가 점점 익숙해지고
내가 없는 그대가 궁금하지 않아도
서로의 슬픔을 나눴기에
이별마저 정겹지만
존박, <임시보관함>
이런 음악은 그의 성격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존박은 담백하다. 느끼하거나 과함이 없다. 그가 진행한 라디오 <존박의 뮤직하이>를 거의 빼놓지 않고 들었는데 존박은 낯간지러운 소리, 입바른 소리를 못하는 성격이다. 그리고 감정기복도 심하지 않고 늘 담담하다. 그런 성격이 취향과 음악에 반영되는 것 같다. 나 또한 감정기복이 크지 않기에 그 감정 에너지가 잘 맞는다. 나의 경우, 감정이 과한 음악을 들으면 일렁이고 동요되는데 그 느낌이 싫다. 감정이 큰 파고를 일으키면 뭔가 불편한 마음이 든다. 들었을 때 무탈한 음악이 좋다. 존박의 음악이 그렇다. 듣는 사람을 진정시키고 차분하게 만든다.
이렇게 감정 기복이 심하지 않음에도 존박의 음악은 색깔이 분명하다. 대중음악을 하는 가수인만큼 대중적인 노래도 내지만 대중성을 벗어날 정도로 자신의 색이 드러나는 음악도 포기하지 않는다. 진한 재지함과 소울이 있다. 나 또한 중고등학생 때부터 R&B소울 장르를 특히 좋아했고, 커서는 점점 재즈도 좋아지는 성향이라 그런지 그의 음악이 취향에 맞는다. 대중적인 것도, 마이너한 것도 모두 내 취향이다. 그는 유명한 삶보다는 대중에게 잊히지는 않는 정도로의 연예인으로 살면서 자신의 색깔은 뚜렷한 아티스트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고 궁예해본다.
습도와 좋아하는 장르가 일치한 덕분인지 그가 추천하는 노래도 대부분 내 취향이다.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취향의 까다로움을 드러내지 않지만 정말로 좋아하는 게 별로 없는 사람이다. 협소한 취향 탓에 누가 어떤 것을 추천해 줘도 만족을 못한다. 그런데 존박이 추천해 주는 것은 타율이 꽤 높다. 그를 통해 알게 된 아티스트 cuco, Rex Orange County, 에밀리 킹, 테임임팔라, 브루노 메이저 등 다 너무 좋다. 비기에 대해 알기 전 존박이 인스타그램에 추천해 준 노래 중에 노래 제목만 없이 앨범 커버만 올린 적이 있었다. 캡처만 해놓고 나중에 알아봐야지 했는데 나중에 알 고 보니 비기였다. 나는 비기의 음악도 좋아한다. 심지어 옛날 옛적 노래까지도 좋다. Chicago - Saturday in the Park 도 존박 덕분에 알게 된 노래다. 맨날 추천받고 싶다.
내게 완벽한 아티스트 존박임에도 한 가지 단점은 있다. 그는 허슬과 거리가 멀다. 잊힌다 싶을 때 한 번씩 앨범을 낸다. 최고로 허슬 했을 때가 1년에 싱글을 4번 낸 것이다. 물론 사람마다 허슬의 기준은 다르지만 팬의 입장에서는 더 많은 음악을 듣고 싶다.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게으른 완벽주의자 성향이라고 한다. 본인이 하고 싶은 음악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기에 가능하다. 그는 앨범 아트워크까지도 고심해서 내는 찐 아티스트이기 때문에 작업량이 많지 않을 수 있다. 아무튼 존박은 내 까다로운 취향을 만족시켜 주고, 나의 취향을 나답게 구분지어주는 몇 안 되는 아티스트다. 그가 오래오래 음악을 해줬으면 좋겠다. 존박은 냉면이 전부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