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직장인 1인의 점심시간 자유쟁탈기
이직을 하고 점심시간이 괴로웠다. 이직 전에는 점심시간만큼은 행복했는데 이제 점심시간마저 불행 해진 건가. 지하 1층까지만 있는 줄 알았는데 지하 5층까지 있었단 말을 주식도 안 하는데 이렇게 체험하게 됐다. 정말 괴로워서 이런 글을 쓴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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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쓴 지도 벌써 2년이 지났다. 여전히 내게 회사 점심시간은 즐거운 시간이 아니다. 회사에 출근하는 것 자체가 즐거운 일이 아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예전만큼 괴롭지는 않다. 그나마 점심시간이 회사에서 숨 쉴 시간 정도는 되는 것 같다. 나만의 극복 방법을 공유해 본다. 예전 글의 속편 정도 되는 것 같다. 단,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기에 모두에게 공감되지 않을 수 있다.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선 괴로웠던 이유를 생각해 봤다. 강제한 것은 아니지만 눈치가 많이 보였다. 의견을 내기 많이 망설여지는 공기였다. 특히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경력직에게는 더더욱 목소리내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회사 생활이 으레 그렇듯 점심시간에도 튀지 않는 게 미덕이었다. 밥은 당연히 먹는 게 무난했고 메뉴는 목소리 큰 중간관리자 남성분들이 제안한 곳을 따르는 게 무난했다. 결국 팀원들이 단체로 가기 쉬우면서 제육, 김치찌개, 부대찌개를 먹을 수 있는 식당에 말없이 따라가야 했다. #내돈내산인데 가기 싫은 곳을 매일 억지로 따라가야 하다니 죽을 맛이었다. 나는 시름시름 앓아갔다.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선택은 내게 중요했다. 점심을 먹을지 말지부터 내 선택의 시작이라고 믿는 내게 모든 것에 눈치를 봐야 하는 환경은 고통이었다. 점심을 먹는다면 혼자서 먹을지, 팀원들과 같이 먹을지, 먹는다면 어떤 메뉴를 먹을 것인지 모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인데 어떤 것도 온전히 내 의지대로 선택할 수 없었다. 점심시간은 내 것이 아니었다. 내 삶의 주인은 나인데 점심시간이 내 것이 아니라니. 규범도 아닌 눈치라서 더 답답했다.
입사한 지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자 나에게도 의견을 말할 용기가 생겼다. 이미지를 포기할 수 있는 용기도 생겼다. 이미지를 고려한다는 것 자체가 내 삶에 없는 옵션인데 회사에서는 필요한 행위였다. 남들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이미지 관리였지만 그마저도 상관 않기로 했다. 점심을 따로 먹겠다고 하기 시작했다. 매일은 아니지만 이따금씩 1인분의 선택권을 가져왔다. 혼밥을 했다. 예전 회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점심을 샐러드로 먹기도 하고 팀점에서 꿈도 꾸지 못했던 줄을 서서 맛집에 도전하기도 했다. 조금 살 것 같았다.
다음 단계의 용기는 팀점 메뉴를 제안하는 것이었다. 입사 초창기에는 그날 가기 싫은 식당에 간다고 해도 말없이 따라가야 했다면 이제는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제안해 봤다. 처음에는 기존에 팀점으로 자주 가던 선택지 중에서 제안했다. 모두가 용인가능한 선택지이기에 가끔은 내 의견대로 행선지가 바뀌기도 했다. 나중에는 좀 더 나아가 새로운 곳, 줄을 서야 하는 곳을 제안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럴 때에는 혼밥을 하기도 했다. 나는 점점 자유를 찾기 시작했다.
나의 자유는 팀원들에게도 옮아가기 시작했다. 점심을 따로 먹을지, 팀원들과 같이 먹을지 ‘선택’을 하는 인원들이 늘어났다. 기존에는 따로 먹는다는 선택지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기에 유의미한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역시 한 명 총대를 메는 것이 필요했다. 굳이 내가 될 필요는 없었는데,, 회사에서 늘 총대를 메는 사람은 나였던 경우가 많았다. 역시 회사 생활은 나와 맞지 않는 것 같다,,,
이렇게 독립을 이뤄낸 나의 점심시간은 요즘 이런 모습이 됐다. 나와 업무를 같이 하는 인원이 늘어나 서너 명이 됐고 팀에서 분리돼 이들과 따로 점심을 먹는 경우가 많아졌다. 우리는 매일 다른 가게에 도전했다. 내가 자꾸 새로운 가게를 들이밀고 후배들은 따랐다. 그 식당들이 이전에 먹었던 가게보다 맛있고 새로운 맛이기에 후배들도 나쁘지 않았나 보다. 그런데 이제는 또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언제든 문제가 없는 경우는 없다. 쉽지 않다. 내 성격 탓일까,,ㅎㅎㅎ
한 지역에서 2년 이상 지내다 보니 도전에 대한 열정도 시들해졌다. 그러던 중 즐겨보는 성시경의 유튜브 ‘먹을 텐데’에서 자극받았다. 그는 젊었을 때 단골집만 갔던 것을 후회하며 여러분들은 젊을 때 매번 다른 가게에 도전하라고 말했다. 먹을 것에 진심인 성시경의 조언이기에 마음에 쉽게 새겨졌다. 새로운 가게에 도전하는 것을 지속하고 싶어졌다. 다행히 을지로에는 백반집이 많아 갈 가게들이 차고 넘쳤다. 같은 제육이어도 가게마다 양념맛도 다르고 기본찬부터 쌈의 구성도 다 다르다. 을지로에서 근무한 지 3년이 넘었는데 아직까지 가보지 못한 백반집 투성이다.
나태하고 권태로워진 내게는 이 이상의 또 다른 자극이 필요했다. 다른 사람의 관점이 더해지길 바랐다. 어딜 가든 내가 제일 먹는 것에 진심인 경우가 많아 내가 새로운 식당을 찾아서 가는 경우가 많다. 비교적 즐기는 편이지만 지치는 경우도 있다. 가끔은 남이 찾은 맛집에 가보고 싶다. 그래서 후배들에게도 새로운 곳을 같이 찾자고 종용하기도 했다. 아재들을 따라가지 않을 거라면, 님들끼리 먹지 않을 거라면, 나와 같이 점심을 먹을 거라면 내가 다섯 번 찾으면 한 번은 님들도 찾아야 하지 않겠냐고 몇 번 호소했다. 그제야 그들도 맛집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점심호소인이 됐다.
후배들이 내가 찾은 식당에 수동적으로 따르기만 했던 것은 회사에서 수동적인 포지션에 익숙해졌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회사는 어차피 내 자아를 죽여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견을 내는 것을 포기하는 것에 익숙해진다. 내 업무임에도, 사소한 것이라도 상사에게 선택을 위임해야 한다. 힘든 회사 생활에서 굳이 점심시간까지 피곤하게 보내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어차피 회사에 올 거라면, 나에게 자유가 주어지는 시간도 있다면 주어지는 그 시간만큼은 좀 더 주도적이 되어보라고 이야기한다. 꼰대 같아 보이지만 나에게는 호소였다.
강제적인 주도성은 아니다. 배려하는 주도성에 가깝겠다. 한 쪽이 수동적이면 다른 한 쪽은 배로 힘이 들고 지친다. 이끄는 에너지까지 배로 들기 때문이다. 퇴근 후 저녁에 갈 맛집만 열심히 찾는 후배에게 원하는 대로 따라가줄 테니 가끔은 서로 배려하자며, 점심메뉴부터 좀 더 본인의 취향과 관점을 담아보라고 이야기했다. 후배에게도, 함께하는 나에게도 윤활유가 될 것이라고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물론 내가 돈도 더 받고 권한도 조금 더 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내가 더 주도적으로 임하고 있다. 꼰대 같기도 하지만 내가 살기 위해서 여러모로 호소해 보는 중이다. 허슬하는 나지만 가끔은 나도 지친다.
이렇게 우여곡절 우당탕탕 후배에게 호소하면서 맛집을 찾아 헤매다가도 클린식이 필요한 경우에는 샐러드를 먹기도 한다. 힐링이 필요한 경우는 포케나 서브웨이를 포장해 청계천변 바위 앉아서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먹는다. 후배들은 샐러드를 싫어하기에 이 경우 대부분 혼밥을 한다. 혼밥을 하고 싶을 때 오히려 이런 음식을 찾기도 한다. 어느 경우든 만족스럽다. 모든 것들이 내 몸 컨디션, 체중관리 등을 고려해 내가 주체적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럴 때 만족감을 느낀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맛없는 것도 맛있는 것도 스스로 선택한, 주체적인 점심시간이다.
회사 일은 대부분 나의 자아를 버려야 하는 경우가 많다. 점심시간까지 자유가 없다면 그것은 내게 정말 가혹하다. 그래서 점심시간에 유난스레 더 집착을 하게 되는지 모른다. 점심시간을 남들보다 까탈스럽게 보낸 덕에 얻게 된 것도 있다. 나에 대해 알게 됐다는 점이다. 내게는 자유가 가장 중요한 가치이고 그것을 누리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 것이 행복에 가까워지는 방법이었다. 역시 세상에 필요 없는 것은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