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보의 슬픈 점심시간 이야기
이직 후 첫 목표 설정 면담시간이었다. 이직을 했기에 업무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을지 내심 궁금했다. 놀랍게도 팀장님은 업무적인 피드백 외에 다른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셨다. 점심시간에 팀원들이랑 같이 점심을 같이 먹을 것을 권하셨다. 게다가 팀 내 언니로 가끔은 여성 후배 직원들을 데리고 나가서 같이 따로 밥도 먹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주제에 대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개선방향을 주셨다. 당황했다.
물론 경력직으로 입사했기 때문에 팀원들과 친해지기 위해 식사를 같이 하라는 것은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공식적인 평가 목표 조정 면담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납득이 되지 않았다. 점심시간은 개인의 휴게시간이라고 믿는다. 이 시간에 나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상사가 나에게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들이미는 것이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같이 먹으라고 하는 것도 기가 찰 노릇인데 나보다 나이 어린 직원들을 데리고 나가서 밥까지 사 먹여야 하는 것은 더 이상했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같이 동원되는 직원도 싫어할 수 있다. 내가 당해도 유쾌하지 않을 일을 역으로 하라고 하다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회사는 이보다 더 말이 안 되는 일도 많지만 그래도 당황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팀장님이 내게 그렇게 피드백을 주신 건 내가 혼밥을 2주째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혼자 먹게 된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다이어트 중이라 샐러드 식단을 2주간 구독하고 있었다. 직장인에게는 다이어트할 자유도 없는 것인가. 게다가 팀원들에게 2주간 같이 샐러드를 먹자고 말하면 도망갈 사람들이 태반이다. 건강을 위해 점심에만 이라도 풀을 먹고살아보겠다고 자처했는데 내 대단한 결심에 고춧가루가 뿌려졌다. 휴게 시간인 점심시간을 팀원과의 친목 도모 시간으로 쓰는 것도, 건강을 위해 샐러드를 먹는 것도 내 자유다. 나는 먹을 자유도 사라진 것에 매우 우울했다. 그나마 있던 샐러드 맛도 뚝 떨어졌다.
사실 샐러드를 먹으며 내심 팀점(팀원들과 다 함께 먹는 점심)을 피할 수 있어서 좋아하고 있던 것도 사실이다. 팀점은 불만족스러웠다. 회사에는 구내식당이 없었다. 그래서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팀원들끼리 함께 점심을 먹었다. 팀장님도 함께한 점심시간은 주 1~2회였다. 팀장님 포함 10명 내외의 인원이 함께 움직였다. 인원이 많다 보니 제약이 많았다. 갈 수 있는 식당이 몇 군데 남지 않았다. 장소는 주로 회사에서 아주 가까운 식당이었다. 또한 모두가 두루 좋아할 메뉴를 선택해야 했다. 팀장님께서는 사비로 점심을 사주셨다. 식비가 따로 나옴에도 밥을 사주셔서 마음이 불편했다. 팀원들은 식비가 지원되니 각자 계산을 해도 된다고 재차 말씀드렸지만 팀장님은 마음이 불편하다고 늘 손사래를 치셨다. 사주시는 것을 알기 때문에 8천 원이 넘어가는 메뉴는 눈치가 보여 원치 않는 메뉴를 먹는 날이 많았다.
팀장님이 계시지 않는 날도 메뉴 사정은 비슷했다. 갈 수 있는 식당에 걸리는 필터가 많은 것은 매한가지였다. 10명 내외의 꽤 대규모의 인원이 움직이기도 하고 게다가 그중 일부 인원은 멀리 가는 것을 싫어했다. 또한 한 끼를 식비 지원금인 6000원 내외로 해결할 수 있는 곳이어야 했다. 일부는 점심에 많은 돈을 쓰고 싶지 않아 했다. 물가와 가성비까지 고려한 합리적인 금액은 7-8000원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누구나 두루두루 싫어하지 않을 만한 메뉴를 골라야 했다. 그렇게 선택지가 줄어드니 회사 근처의 백반집이나 제육볶음, 돈가스, 김치찌개, 칼국수 등 손에 꼽는 곳만 남게 되었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도 아니고 일주일에 한 번씩 돌아오는 이 식당들에 금세 질려버렸다.
또한 나는 친하지 않은 남자들과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꾸준히 끼니를 때우는 목적의 식사를 한 것이 처음이었다. 이 시간은 식사에 대한 30대 후반 이상 남자 직원들의 인식과 나의 인식 차이를 크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30대 후반 이상 남자 직원들의 점심 메뉴 선정은 단순했다. 제육볶음, 김치찌개, 돈가스 이 세 가지만 있으면 오케이였다. 그들은 내가 좋아하는 떡볶이는 선호하지 않았다. 그리고 남자 동료들은 오로지 밥을 먹기 위해 멀리 이동하는 것도 귀찮아했다. 그들에게 점심시간은 그저 끼니를 때우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내게 점심시간은 맛있고 다양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이거나 쉬는 시간이었다. 회사에 다니는 유일한 낙이었다. 그 시간이 송두리째 사라지니 더 고통스러웠다. 이렇게 한정적인 메뉴와 맛의 식사를 1년을 지속하니 너무 불만족스러웠다. 세기의 맛집도 1~2주에 한 번씩 1년 동안 가면 질릴 것이다. 식비는 더치페이라 #내돈 내산(내 돈으로 내가 사 먹는다)인데 고통스러운 것이 더 억울했다. 이렇게 점심시간을 보낸 지 2~3개월 만에 점심시간이 괴로웠다. 삶의 질은 하락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점심시간이 회사에서 내게 주어진 유일한 자유라고 느꼈다는 사실이다. 회사에서 대부분은 내가 결정할 수 없다. 업무는 물론이고 휴게실에서 쉬는 것도 눈치가 보인다. 그런데 점심시간은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으며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는 시간이다. 어떠한 결정도 내가 할 수 있는 시간이다. 하루 중 유일하게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는 시간인데 이 또한 단체 혹은 팀장의 기준에 맞춰야 한다는 사실에 숨통이 막혀 왔다. 이 시간까지 자유의지를 침해를 당하자니 너무 답답해서 미칠 노릇이었다.
사실 평가목표 조정 면담 시 먹을 것에 대해 한 가지 피드백을 더 들었다. 자리에서 간식을 먹지 말라고 하셨다. 나는 3~4시경 간식을 먹고 있었다. 많은 직장인들은 이때쯤 배가 고픈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과일을 싸와서 먹거나 견과류를 먹거나 닭가슴살 칩을 먹었다. 이것 또한 팀장님의 눈엣 가시였나보다. 이런 피드백을 듣고 황당했고 납득이 가지 않았다. 동료와 함께 나가서 담배를 하루에도 서너 번 피우는 것은 용인되면서 자리에 앉아 일을 하면서 혼자 간식 먹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일을 하는데 먹고 안 먹고 가 그렇게 중요할까. 회사는 일을 하기 위한 곳인가 아니면 일을 하기 위해 금식을 해야만 하는 곳인가. 배고픔을 견뎌야 하는 문화는 내가 회사에서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되기에 충분했다.
힙합에는 ‘IDGAF’라는 코드가 있다. 힙합 음악 가사나 래퍼들의 인터뷰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다. 이는 ‘I Don’t Give A Fuck.’의 약자다. ‘I don’t care.’의 격한 버전이라고 한다. 힙합답다. 신경 쓰고 눈치 보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태도를 뜻한다. 힙합에 대한 편견 때문에 나쁜 뜻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나는 너를 무시할 거고 내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다 나쁘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저를 어떻게 보든 저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저는 저예요. 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세요.’라는 뜻이다.
IDGAF은 자기를 더 자기답게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나 자체의 생각과 태도를 인정해준다면 나는 나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을 하기 위해 좀 더 노력할 것이다. 남의 생각 때문에 나를 의심하고 부정하는 시간을 아낄 수 있다. 아낀 시간을 내 고유성, 전문성, 능력을 강화하는 데 쓸 수 있다. 시간은 금이다. 일개 아무개 사원을 대체 불가한 유니크한 직원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다운 것을 계속하니 일관성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것이 성과를 만들어 내야 하는 회사에서 더 생산적 일지 모른다.
래퍼 애쉬비는 전 회사(소속사)에서 하지 말라는 것이 너무 많아서 괴로웠다고 한다. 섹슈얼한 음악을 하고 싶었던 그녀를 전 회사에서 말렸나 보다. 회사에서는 야한 가사는 사람들이 싫어하고 모두가 부를 수 없다고 했다. 행사를 돌아야 하기 때문에 모두가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만들라고 강요했던 것 같다. 결국 그녀는 남의 말을 들어야 해서 본인의 색깔도 잃고 인기도 잃고 우울증만 얻었다고 한다. 그녀는 결국 회사를 나왔다. 역시나 나오자마자 대박이 났다. 그녀의 대표곡이 된 <Booty>는 회사를 나오고 한 달 반 만에 낸 곡이다. <Booty>는 다 같이 따라 부를 수는 없지만 혼자서 듣는 것만으로도 신나고 화끈한 음악이다. 애쉬비는 IDGAF의 태도로 그녀의 음악을 계속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업무를 하는 것도 시달리는데 밥은 좀 자유롭게 먹으면 안 될까. 나다움도 없어지고 밥벌이를 하기 위해 밥도 내 맘대로 못 먹는 곳이 회사라는 것을 느낀다. 이게 점심시간에만 해당되는 일일까. 아니다. 업무까지도 이런 일들이 이어진다. 모두가 일률적인 행동을 해야 하고 개인을 인정해주지 않는 태도 때문에 일이 더 하기 싫다. 생산성과 사기가 뚝뚝 떨어져 나간다. 힙합은 내게 ‘너 자신으로 살아가라’고 말한다. 회사는 힙합이 아니다.
몰라 바빠 그냥 하루 종일
그냥 해 내걸
그냥 하다 보니 나쁜 여자들이
원해 나란 놈 비결은 알아도 안 말해줘
추지 않고 내 음악에 추게 둬
왼손에 내 엉덩이 Yo
왼손에 엉덩이 Yeah
오른손은 Make me hot (hot)
오른손은 Make me hot
-애쉬비 <Boo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