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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품위있는 그녀 Mar 30. 2024

하기 힘든 말
(feat. 저 좀 도와주실래요?)

도움을 요청하는데도 용기가 필요하다.

"저 남자가 내 사람이다! 저 남자가 내 애인이다. 왜 말을 못 하냐고!"

20년 전 수많은 명대사를 남겼던 드라마.

파리의 연인 속 남자주인공 박신양의 명대사처럼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수록 말하기 어려운 말이 있다.

바로 도와달라고 말하는 것.


'도와주세요.' '잘 못하겠어요.'라고 어린 시절 수시로 했던 그 말 한마디가

30대 중후반이 된 이 시점엔 

입 밖으로 내뱉기 왜 이렇게 어려운지...


아마 도와달라고 말하면, 내가 부족한 사람으로 보이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 때문 일 것이다.

나는 이렇게 도와달라고 말을 못 하는 습관? 때문에 낭패를 본 적이 있다.


얼마 전 일이다.

1년 전부터 헬스에 빠져 주 2-3회 이상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헬스장에 간다.

헬스장에는 관리를 해주시는 센터장님이 상주해 계신다.

입주민들을 상대로 개인 pt도 진행하고, 시간이 날 때는 운동하는걸 조금씩 봐주시는데

어느 날 등운동을 하고 있는 내 자세를 보시더니

데드리프트나, 바벨로우 같이 당기는 동작을 할 때 헬스용 핸드스트랩 착용을 하면

바벨과 손목을 안정적이게 잡아줘서 자세가 더 좋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얘기를 듣고 그날밤 침대에 누워 헬스용 스트랩을 검색했다.

장비에 대해 잘 알지 못하니

헬스인들 사이에서 평이 좋은 브랜드에서 가장 판매율이 높은 스트랩으로 구매를 했다.

밤늦게 주문을 했음에도 총알 배송 덕분에

다음날 오후 외출했다 집에 돌아오니 문 앞에 주문한 택배가 도착해 있었다.

부푼 기대를 안고 택배 상자를 개봉하기 시작했다.

상자 안을 꽉 채운 무언가가 들어있을 것 같은 기대와는 다르게

1호 택배 상자 안엔 작은 비닐백에 스트랩 2개와 명함만 한 사용설명서가 들어있었다.

전혀~ 친절하게 쓰이지 않은 설명서를 읽고

스트랩을 착용했는데 이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해보는 것보다 뭐 가서 운동해 보면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헬스용 더플백에 스트랩을 넣어 등운동을 하러 출발했다.

아이템을 하나 추가 했으니

내 운동능력도 뿜뿜 할 것 같은 기대감에 들떠 있었다.


풀업과 렛풀다운으로 몸을 예열하고,

드디어 아이템의 효과를 볼 데드리프트의 시간이 왔다.

설명서에서 본 대로 스트랩을 착용하고 바벨을 잡았는데 생각보다 손목이 고정되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스트랩을 꽉 조여도 보고, 방향을 비틀어도 보고

요리조리 돌려 봤는데도 이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설상가상 운동에 집중하지 못하고 허둥대는 바람에 꽉 닫지 않는 물통도 엎질러서

바닥에 물이 흥건하게 고여있었다. 

휴게실에 왔다 갔다를 반복하며 휴지로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주위의 사람들이 어리바리한 내 모습을 보고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데드리프트는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등에서 땀이 맺혔다.

그때 내 눈에 저 멀리 회원과 PT수업 중인 센터장님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마음속에서 어떻게 착용하는지 알려달라고 할까? 말까?라는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운동하다가 내가 조금만 어려워도 잘 알아채서 먼저 다가오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내쪽을 쳐다도 보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스트랩착용법을 물어볼까? 말까?' 이 생각 때문에 운동에 집중을 할 수 없었다.


무수히 많은 고민 끝에 난 결론을 내렸다.

'스트랩이라고 다 같은 모양이 아닌데 저분이 알겠어? 

지금 pt 받는 회원이 있으니 저 사람의 시간을 뺏는 건 예의가 아니야!'라고


결국 손목에 달랑달랑 거리는 스트랩을 착용한 우스꽝스러운 차림으로 운동을 마쳤다.

그날의 운동은 스트랩에 정신이 팔려 집중하지 못한 대가로

운동이 아닌 노동을 하고 온 셈이었다.

집에 도착해서 샤워를 하고 나니 온몸이 무거웠다. 

자세를 올바르게 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내 속마음은

도움을 요청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진짜 마음조차 스스로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아

타인의 시간을 뺏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핑곗거리를 찾았다.


몇 번 시도해 보다 안되었을 때 직접 가서 도와달라고 요청했다면...

시간을 허비하지도 않았을 테고

운동도 무사히 잘 마쳤을 텐데...


생각해 보니 사소한 것도 타인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던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아이의 새 학기 준비물 구입으로 문구점에 갔었을 때도 그랬다.

문구점 입구에서 카운터에 있는 여사장님에게 10칸 노트가 어디 있나요?라고 물었더니

14-1로 가서 보라는 답이 돌아왔다.

운동장같이 넓디넓은 문구점에서

14-1을 어렵게 찾았다.

그랬더니 웬걸 14-1에는 8칸 노트, 10칸 국어, 10칸 쓰기, 10칸 국어 남자, 10칸 국어 여자 등

어마어마한 종류의 노트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눈을 크게 뜨고 10칸 노트를 찾았다.

14-1 구역을 찾느라 고생해서 인지 아무리 찾아도 10칸 노트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카운터에 있는 여사장님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다.

하지만 문구점에 들어올 때부터 손님은 나 혼자였는데

내 물음에 눈 한번 안 마주치고 구역만 알려준 거에 대해 기분이 상해있었다.

결국 10분 넘게 쪼그린 자세를 취해가며 원하는 10칸 노트를 손에 넣었다.

찾았다는 희열도 잠시

결제를 하고 돌아오며 생각해 보니, 안 보이면 물어보면 되는 거지

그게 뭐가 어렵다고 나는 혼자 낑낑댔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5분도 안 걸릴 일을 20분을 쓴 셈이었다.


'다른 사람에게서 도움받는 것을 수치스러워하지 말라.'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제7권 7에 쓰여있다.


내 아이 이게는

또 학교에서 만나는 나의 학생들에게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이야기해~ 도와줄게"라고 이야기한다.

아이들의 도와줄 마음이 항상 열려 있다.

길을 걷다가 도움을 요청하는 어른이 있으면 기꺼이 도와준다.

하물며 헬스장에서 러닝머신 조작법을 몰라 어려워하는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서 알려주기도 한다.


그러면서 정작 나는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

혼자 해내려고 하다가 실패에 부딪히기도 한다.

시간을 낭비하기도 한다.


어른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안 된다는 잘못된 고정관념이

부끄러움과 수치심이

많은 손해를 보게 한다.


함께 사는 세상에서

도움을 주고받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 말이다.


미움을 받을 때와

행복해질 때만 용기가 필요한 게 아니다.


도움을 요청할 때도

용기가 필요하다.


조금 어렵긴 하지만,

앞으로 도움받을 용기를 내 보려고 한다.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도움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도움을 청할 것이다.


가끔 또 용기가 안 나서 혼자 애를 먹는 일이 또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용기를 내봐야지.


요즘 잠들기 전 이불속에서 혼잣말로 연습해 본다.

"저 좀 도와주실래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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