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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품위있는 그녀 May 31. 2024

일상의 행복이란 이런 거죠

내일도 아니고 오늘도 아니고 지금을 살기

매일 아침 아이를 학교 앞까지 바래다주고 집에 돌아오면 혼자만의 시간이 시작된다.

지난 수요일.

그날도 집에 돌아와 블루베리 베이글과 커피 한잔을 내려 가지고 서재에 갔다.

의자에 앉아 독서를 시작하려는데 책상 끝에 색종이 두장이 놓여있는 게 보였다.

요즘 종이 접기에 빠진 아이가 접다만 색종이를 올려놓고 간 것인가 생각했다.

정리를 하려 가까이 가서 보니 색종이 위에 삐뚤빼뚤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엄마 예쁘게 그리세요'

'새로운 그림은 새도구로 그려요'

그리고 그 밑에는 처음엔 색종이에 가려 보이지 않았는데

내가 가지고 싶었던 마카세트가 놓여 있었다.



3년 전 함께 근무하던 선생님을 통해 그림에 입문하게 되었다.

색연필, 아크릴물감, 펜, 마카 등 여러 미술용품을 지인을 통해 빌려 연습해 본 결과

마카가 나와 잘 맞는다는 걸 느꼈다.

형광펜처럼 넓은 면으로 종이 위에 채색하는 그 느낌.

급하고 꼼꼼하지 못한 성격인데 슥슥 표현해도 그럴싸해 보이는 게 좋았다.

물감처럼 그리기 전에 많은 준비가 필요하지 않은 것도 마음에 들었다.

단점이라면 1개당 2,500원에서 5,000원까지 하는 사악한? 가격이었다.

그림 입문자인 내가 마음에 든다고 덜컥 세트로 구매하기에는 부담이 되었다.

내가 쉽게 질리기도 한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샀다가 색연필이나 물감처럼 조금 쓰다 짐만 되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 망설여졌다.

일단 시작하는 거니 세트로는 사고 싶고, 가격은 부담이 되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동네 중고거래 사이트에 마카를 검색했다.

마카세트를 저렴하게 판매한다는 글이 올라와있었다.

올린 지 며칠 지난 글인데도 누가 먼저 채가기라도 할까 봐 늦은 밤 판매자와 연락 후 바로 구입하기로 하였다.

그렇게 3년 전 중고로 산 마카를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었다.

다행히 꾸준히 못하는 성격 보유자치고는 현재까지 마카드로잉을 하고 있다.

중고이다 보니 나오지 않는 색들도 있고, 원래 구매하고 싶었던 회사의 제품은 아니었기에

조금만 더 쓰고 새로 사자라고 생각하고 구입은 다음날로 미뤄왔다.

그림을 완성한 후에 남편과 아이에게 보여줄 때 '색이 더 많았으면 좋았을걸~'이라고

무심코 말했던 것 같은데

남편이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필요한 걸 말하지 않았는데 선물해 준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아무 일도 아닌 날 이렇게 서프라이즈 선물을 준비할 거라곤 전혀 생각 못했다.

남편은 서프라이즈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결혼생활 8년 동안 결혼기념일이나 내 생일같이 특별한 날에도 필요한 물건을 사러 같이 백화점에 간다.

"이벤트 좀 해줘!"라고 노래를 불러도 꿈쩍 안 하던 사람이,

이런 이벤트를 해주니 (그것도 낙서같이 보이는 편지와 함께) 감동이 밀려왔다.

동시에 조금씩 변하려고 노력하는 남편에 대한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이게 정말 행복인 건데..."라는 혼잣말이 나도 모르게 입에서 나왔다.

지금까진 이런 작은 선물이 주는 만족과 행복보단

비싼 것을 사야만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소비를 통해 나는 이 정도 살 수 있는 사람이고, 잘 살고 있는 거라 믿었다.

페레가모. 토즈. 프라다. 루이뷔통. 생로랑. 셀린. 펜디. 구찌. 샤넬 등

마치 명품샵을 도장 깨기 하듯

여유가 생기면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 옷과 가방을 사들였다.

나에게 주는 힐링이라는 이유를 대면서 말이다.

예전엔 감히 엄두도 낼 수 없었던

이 브랜드들의 옷과 가방을 살 수 있는 게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금액이 커질수록, 횟수가 잦아들수록 구입 후 밀려오는 공허함도 컸다.

한 달 뒤 날아오는 카드명세서를 마주하게 되면 후회도 들었다.

그래도 '당장 내가 느낄 수 있는 행복이 없으니 이런 거라도 사야지'라는 보상심리로

쇼핑은 멈춤 줄 몰랐다.


올해 3월부터 육아휴직에 들어가 아이가 학교에 가면 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나에게 집중하고 내 마음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출근해서 남에게 보여줄 일도, 꾸미도 나갈 일도 줄어드니

점점 옷과 가방에 대한 욕심도 줄어들었다.

3-4월엔 바디프로필 촬영 준비로 인해 오전. 오후 하루 2번 이상 운동을 해야 했기 때문에

좋은 옷보단 운동하기 편한 운동복에 손이 더 갔다.

옷이 가벼워지니 비싼 가방을 멜 일 또한 줄어들었다.

중요한 약속이 있으면 그동안 사놓은 옷에서 골라 입고 가도 충분하다고 느꼈다.

맛있고 영양가 있는 음식들로 한 끼 한 끼를 잘 먹고

정돈된 집에서 하루를 잘 보내는 게 좋아졌다.

비싸고 거창한 것보다는

일상에서 내 마음을 기쁘게 해 주는 것이 점점 중요해진 것이다.

오빠의 마카선물을 받는 순간.

작은 것에도 행복했던, 10대 20대 시절의 감정이 느껴져 반가웠다.


"돈보다 더 중요한 건 여기 있어"라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행복을 내 인생의 마지막 버킷리스트인 것처럼 살아왔다.

지금 내가 겪는 작은 행복이 진짜 행복이 아닐 거라고 의심했다.

이것만 참고 버티면 더 행복해지겠지?라는 생각으로 오늘이 아닌 내일을 위해 하루하루를 보냈다.

요즘은 내일도 아니고 오늘도 아니고

지금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휴직이 끝나고 복직을 하면서 바쁜 일상을 보내다 보면 또 소비욕구가 스멀스멀 올라올지도 모른다.

일상보다 일이 더 중요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야지.

지금이 중요하니까.



                                                                                이미지출처 : Image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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