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되어보니 알 것 같은 친정엄마의 마음
우리 집냉장고에는 내 정신과 마음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는 뜻이다.
마음이 맑은 날 냉장고는 정리가 잘 되어있다.
무슨 물건이든지 원하는 건 쏙쏙 찾을 수 있다.
내가 우울할 땐 냉장고 속도 똑같다.
당근 하나도 보물찾기 하듯 찾아야 한다.
어디 어디 숨었나 앞에서부터 식재료를 다 꺼내야 구석에 숨은 당근을 발견할 수 있다.
결혼할 때 혼수로 들고 온 냉장고는 10년 가까이 나와 동고동락하였다.
일과 육아에 힘들어 늙어 버린 나처럼
8년 전 가전매장에서 최신형으로 엄마가 사줬던 냉장고는
손때가 묻을 대로 묻어 행주로도 잘 닦이지 않는다.
어디에 부딪힌 건지 군데군데 움푹 파인곳도 있다.
주인을 닮아가는 건지
신혼 초 잘 정리되어 있던 내부와는 다르게
지금은 냉장고문을 활짝 열어 누구에게 보여주기 민망하다.
냉장고 속을 보여준다는 건
내 속을 보여주는 것과도 같다.
그래서 손님이 와서 주스라도 꺼내야 할 때면 안이 보일랑말랑 문을 열고 재빠르게 필요한 걸 꺼낸다.
앞에서 말했듯 처음부터 냉장고 안이 어지럽진 않았다.
신혼 초에는 매일 정리했다.
아이가 태어난 후엔 가끔씩 와 정리를 도와주는 친정엄마 덕에 항상 깨끗했다.
엉망진창으로 더러워지기 시작한 건
아마 나와 남편이 주말부부가 되면서
집안일 외에 신경 쓸게 많아진 후부터인 것 같다.
요즘은 집에 있는 시간도 많아지고
마음에 여유도 생기다 보니
자주는 아니지만 냉장고 정리도 주기적으로 한다.
하지만 사람이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듯
냉장고도 청소 한 번에 바뀌지 않는다.
여전히 정리를 하다 보면 껍질을 깐 반만 썰은 양파가 여기저기 밀폐용기에 담겨있고
언제 뜯었는지도 모를 치즈와 베이컨 2장이 발견된다.
아마 샌드위치를 하고 나중에 먹겠다며 남은 걸 넣은 것 같다.
버리기 아까워서 나중에 꼭 활용해야지 하며
반찬통에 담아놓은 게 결국엔 쓰레기가 되었다.
원래 살림과는 거리가 먼 나지만
이혼 후 혼자 두 딸을 키워야 했던 나의 어머니는
적은 않은 수입에도 불구하고 두 아이를 잘 키우려 부단히도 애썼다.
먹는 것 또한 잘 먹이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손이 크진 않았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 때문에 그렇게 변했는지도 모르겠다.
15년 전 내가 중고등학생 때만 해도
교실 난방을 지금처럼 온풍기가 아닌
난로에 등유를 넣어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기름당번 2명이 짝을 지어 매일아침 기름통을 들고 창고에 가 기름을 받아 교실로 들고 온다.
(이건 더 상상도 할 수 없다...)
여학생 둘이 1층 창고에서부터 3층 교실까지 무거운 기름통을 들고 오다 보면 넘쳐흐른 기름 때문에
어느새 교복치마와 손엔 기름냄새가 배어있었다.
손에 밴 기름 냄새는 비누로 몇 번을 닦아도 없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그 냄새를 이겨내고
매일아침 그 무거운 기름통을 끙끙대며 가지고 올 수 있었던 이유는
난로 위에 구워 먹던 쫀드기와 쥐포 같은 간식이 있기 때문이었다.
점심시간 1시간 전부터 각자 자기가 싸 온 도시락을 꺼내 난로에 올린다.
기름당번 2명은 4교시동안 번갈아 가며 목장갑을 끼고 도시락 위치를 바꾼다.
도시락 안에 든 김치와 밥이 골고루 익게 하기 위함이다.
가끔 당번이 제 역할을 하지 않아 도시락 위치를 잘 섞어주지 않으면
맨 아래 있던 도시락에선 김치국물이 부글부글 끓어 난로 위로 넘치는 대참사가 발생한다.
아무튼 난로에 데워먹는 김치볶음밥은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김치볶음밥이지만 다 같은 김치볶음밥이 아니었다.
콘옥수수, 햄(햄도 스모크햄이냐 소시지에 따라 달랐다.), 달걀, 치즈 등
부가적으로 들어가는 재료에 따라 다른 맛이 났다.
집집마다 김장을 했던 그 시절.
그래서 김치 맛도 제각각이었기에
김치와 밥 두 가지만 넣은 도시락도 다 다른 맛을 냈다.
내 도시락엔 옥수수콘, 햄, 치즈를 엄마가 골고루 넣어주셨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많은 김치양에 비해
좋아하는 햄과 치즈는 항상 적게 들어있었다.
버터도 넣은 듯 만 듯 향만 났다.
반면 같이 점심을 먹던 친구의 김치밥은 항상 치즈가 넘쳐흘렀다.
아마 그 생각은 친구들과 도시락 뚜껑을 열어
나와 다른 아이들을 비교하게 되면서부터 들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취업을 하게 되면서 많진 않지만 대학시절엔 상상할 수 없었던
월급이란 걸 받게 되었고
나는 그때 받은 돈을 먹는 거에 많이 썼다.
아니 다 썼다.
궁금하고 맛있는 건 먹어보려고 했다.
집에서 요리할 때도 재료를 아끼지 않고 듬뿍듬뿍 넣었다.
결혼을 해서 남편과 둘이 먹는 저녁밥을 차릴 때에도
뭐든지 푸짐하게 차렸다.
또 내 아이에게는 좋은 것만
듬뿍듬뿍 먹여야지라는 생각으로 재료도 좋은 것만 썼다.
하지만 그때의 마음이 여전하진 못하다.
아이가 크면서
하고 싶어 지는 것도 많고 원하는 것도 많아졌다.
태권도도 축구도 레고도 여행도
어린 시절 내가 겪은 결핍이 아이에게 생기기라도 할까
내 능력이 닿는 한 해주려고 노력하다 보니
먹는 걸 점점 아끼게 된다.
육아휴직에 들어가 수입이 절반이상 줄어든 요즘
(고정지출은 자꾸만 늘어가는데...)
가계부를 정리하면 한숨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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