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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민재 May 03. 2018

무(無)에서 시작하기


너무 복잡하고 헷갈릴 땐 일단 다 내려놓고 무(無)에서 시작하는 것이 도움이 될 때가 있다.

     

우리집 거실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소파의 한 쪽 자리엔 아이의 책, 영어 오디오 씨디, 헤드폰, 장난감, 연필, 노트 등등 다양한 잡동사니들이 쌓여 있었다. 매번 그 자리를 보면서 마음이 불편하였지만 치우지도 않고 지냈다. 하나 하나 정리하려고 하다 보니 엄두가 나질 않았고 그러다보니 자꾸 치우는 것을 미루게 되었다. 그 자리에 있는 물건들을 치울 생각만 해도 복잡하고 어려운 기분이 되곤 하여 그냥 포기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모든 물건들을 그냥 한 쪽 팔로 싹 쓸어서 소파 밑 거실바닥으로 떨어뜨려보았다. 일단 속이 시원하였다. 거실의 한 쪽에 빈공간이 나오자 그 공간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비로소 바닥에 있는 물건들을 시간 날 때마다 하나씩 제 자리에 놓아둘 수가 있었다.  

     

인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마흔이라는 나이를 맞이하게 되고 인생의 후반부를 생각하게 되었을 때 무엇을 하면서 살면 좋을지 고민을 거듭해도 답을 얻기가 어려웠다. 그동안 내가 배우고 경험해온 것들을 되새김질 하면서 각각의 선택에 대한 장단점을 따져보다보니 점점 더 미궁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그 무엇 하나 마음에서 강하게 이끌리는 것이 없으면서도 딱히 이것만은 내가 자신있다고 내세울 수 있는 것도 없어서 우울하고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뭔가를 시작한다는 것이 너무 무겁고 어렵게만 생각되었다.

     

그렇게 갈팡질팡 머릿속에서만 분주하게 이 일 저 일을 왔다 갔다 하던 내게 도움이 되었던 생각은 모든 경력을 다 뒤로 미뤄놓고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상태에서 다시 시작해보자는 마음가짐이었다.

     

도시공학자, 백화점 매입 바이어,  IT개발자, 프로젝트 매니저, 인력개발기획원, 미술치료사, 커리어컨설턴트, 취업지원관, 심리상담자......

     

이전의 일의 경험을 다 내려놓고 지금 현재 내가 놀이처럼 생각하고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것만 올려놓기 시작하자 비로소 뭔가를 해보고자하는 에너지가 생겼다. 내게는 글쓰기가 무대에 등장했다. 그래서 쓰기 시작했다.

     

앞으로 어떤 형태의 일이 내 인생 후반부의 일의 영역이라는 자리에 올려놓아질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미 한 번 모두 다 내려놓고 비워보았기에 그에 대한 두려움이나 불안은 많이 줄어들었다. 이제 남은 것은 정말로 원한다고 생각되는 것을 차분히 하나씩 올려놓아 보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설레이고 기대된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선택을 할지 너무 헷갈려서 결정을 미루다가 무기력해진 자신을 보고 있다면 일단은 모두 다 내려놓고 한 템포 쉬면서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는 것도 방법이라고 알려 주고 싶다. 고요하고 텅빈 가운데 불쑥 솟아나는 무언가를 발견할 때까지 말이다. 겪어보니 그래도 괜찮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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