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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다, 나 돈 없지

제가 바로 돈 없는 백수입니다

by 삼십대 제철 일기


"쉬는 김에 하고 싶은 거 다 해봐."
"이럴 때 유럽 여행 가야지."
"시간 되면 한 번 놀러 올래?"


'백수'가 됐다고 하면 자주 듣는 말들. 일을 하고 있으면 '긴 휴가'를 쓸 수 없으니 이왕 쉬는 김에 원 없이 놀아보라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입장이 바뀌었다면 나였어도 그렇게 말했을 것 같다.


하지만 늘 그렇듯 문제는 돈!


나는 계획에 없는 퇴사를 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준비가 안 된 상태였다. 어느 정도 돈을 모아뒀다거나, 재테크를 준비해 놨다거나 등등의 멋진 자세를 취해본 적이 없다. 어쩔 수 없이 퇴사를 했고, 아무런 계획도 없었고, 그러니 돈을 쓸 용기도 없는 상태.


퇴직금이 아주 큰 힘이 됐다. 퇴직 연금이기 때문에 최대한 건드리지 않으려 했는데,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 IRP를 해지하고 그 돈을 야금야금 썼다. 외벌이 가장이 된 남편에게 미안해져서 가계 대출을 조금 갚았더니 순식간에 잔고가 빈약해졌다.


생필품이나 식비는 남편 카드로 쓰기로 했는데, 그게 참 민망했다. 버는 사람 따로 있고 쓰는 사람 따로 있나. 자꾸만 그런 식으로 생각이 들었다. 백수가 된 직후엔 돈 문제로 다투기도 했다. 부담감 때문이었다.


갑자기 한 사람의 소득이 사라지고 나니, 재정적으로 체감이 확 됐다. 더 이상 저축도 못하고, 큰 소비는 엄두도 못 냈다. 남편은 카드값이 빠져나갈 때마다 부담을 느꼈고, 나는 더 아껴야 된다는 압박감에 부담을 느꼈다.


퇴사 직후엔 하루 종일 돈 생각만 했다. 모든 계좌를 들여다보고, 혹시 잊고 있는 돈은 없는지 확인했다. 부업을 할만한 게 없는지 기웃대고 앱테크라도 해보겠다고 쓸데없는 앱을 많이도 깔았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벌 수 있는 돈은 한 달에 몇 천 원 정도. 시간 대비 생산성이 낮았다. 결국 쓰는 돈을 줄이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하루 소비 0원 챌린지'


스스로 챌린지를 만들어서 최대한 소비를 줄였다. 일정이 없으면 소비할 일도 없다. 운동을 하고 싶으면 홈트레이닝을 했고, 집에 있는 게 지루하면 도서관에 갔다. 밥은 항상 집에서 만들어 먹고 커피는 대용량으로 사 둔 카누를 타 먹었다.


늘 텀블러를 들고 다니며 커피나 얼음물을 싸가지고 다녔다. 여름에는 대용량 아이스크림을 사서 텀블러에 넣어가지고 다녔다. 이건 정말 좋은 방법이다. 인터넷에서 5L짜리 대용량 아이스크림을 1만 원대에 살 수 있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한 통 사면 활용도가 높다. 텀블러에 넣어 다니면 한여름에도 녹지 않고, 거기에 진하게 탄 커피를 부으면 아포가토가 된다. 요구르트 아이스크림을 사는 것도 좋다. '요아정'을 무한대로 만들어 먹을 수 있으니. (짠순이 꿀팁은 나중에 모아서 쓸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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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없으면 또 없는 대로 살아진다. 알뜰하면서도 즐거울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양심은 지키면서 소비하는 요령도 생긴다. 이제 나는 돈을 한 푼도 안 쓰고 시간을 보내는데 도사가 됐다.


하지만 이건 혼자 있을 때만 가능하다. 누군가를 만나면 반드시 돈을 쓰게 된다. 백수라고 마냥 얻어먹을 수 있나? 나는 아직 뻔뻔한 백수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아직도 내가 먼저 카드를 꺼내는 습관이 남았다.


그러다 보니 '만나자'는 얘기에 시원하게 답변을 못한다. 물론 여전히 혼자의 시간을 누리고 싶은 마음이 더 크기도 하지만, 일단 나가면 돈이니 백수 입장에선 망설일 수밖에. 아직도 명쾌하게 날짜를 잡지 못한 약속들이 많다.


백수가 되니 하고 싶은 일이 생겨도 돈 때문에 포기하는 때도 많다. 예전 같으면 고민 없이 일단 저지르고 봤을 일도 아예 고민 없이 관둬버린다. 소비, 여행, 취미, 학습, 문화생활 등등 모든 부분에서 그렇다.


허탈했다. 그럼 나는 쉬는 동안 뭘 할 수 있을까? 높은 우선순위를 정해놓은 몇 가지 빼고는 다 내려놓고 살아야 하나? 하고 싶은 게 있어도 외면하면서?!


그럴 순 없다. 수개월 간 이런 문제로 혼자 안달복달하다가, 이제는 정도를 찾았다.


버는 돈이 없으니 쓰는 돈을 최소화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다. 다만 스스로 옭아매지는 않기로 했다. 가끔 기분 전환하고 싶으면 카페도 가고, 친구도 만나고, 쇼핑도 할 수 있는 거다.


만약 퇴직금이 떨어지거나, 비어 가는 잔고를 보며 심하게 불안해지면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다시 일터로 복귀하면 된다. 세상만사 너무 어렵게 생각하면서 벌벌 떨지 말자. 돈 없는 백수라고 꿈도 없는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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