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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린 일기 Nov 05. 2020

(#065) 2018. 9. 13.

Paris-Saint jean pied de port 0km

출국

9월 12일 인천. 파리행 비행기에 입국 수속을 하며 배낭에 등산화를 신은 나는 대기줄 앞뒤에 선 다른 승객들의 시선을 끌었다. 누가 봐도 등산객인 이들도 때때로 만났지만 파리행 수속 대기줄 커다란 캐리어 사이에 등산배낭은 조금 더 눈에 띄었다. 급기야 어디 가냐며 묻는 이들이 생길 지경이었다. 한 달 넘게 사용할 짐을 간추린 배낭을 수하물로 부치고 유심카드를 찾아 출입국관리소를 지났다. 이른 오후에 출발한 비행기는 같은 날 오후 아홉 시 깨 샤를 드골에 내렸다. 이튿날 열 시경 출발하는 기차까지 열두 시간 남짓. 마지막 한식 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몽파르나스역 근처 한인 민박을 잡았다.


동행

시차도 적응 안되고 입도 덜 풀려 어리바리한 와중. 여러 사람이 같이 쓰는 이층 침대는 너무 덥고 동시에 추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밤새 뒤척이다 새벽 네시쯤 눈을 떴는데, 마침 나 같은 사람이 하나 더 있어 우리는 즉흥적으로 에펠탑을 보러 가기로 했다. 파리는 초행인 데다 그도 나도 다른 일정에 밀려 새벽밖에 시간이 없어 메트로 첫차에 맞춰 길을 나섰다. 게스트하우스의 매력은 이처럼 적당히 마음이 맞으면 동행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아침 여섯 시. 조식이 차려지기도 전이라 근처 빵집을 찾았다. 유명한 집을 검색할 필요도 없이 골목마다 가득찬 빵 굽는 냄새를 찾으면 된다. 비브 라 프랑스! (c)밀린 일기


에펠탑

문을 직접 여닫는 메트로는 조금 신기했다. 숱하게 읽었던 인종 차별도 걱정되고 불어는 너무 짧아 목적지까지 무사히나 갈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다행히 우리는 둘이었고 서로 부족한 부분을 적당히 채울 수 있었다. 오랫동안 준비했던 임용고시를 붙고 발령 전 꿀 같은 휴가를 즐기러 왔다던 그. 무슨 대화를 나눴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주변 눈치를 한껏 살피며 떠들다 보니 금세 목적지에 도착했다. 어슴푸레 밝아오는 하늘 뒤로 에펠탑이 솟았고 주변에 노점 하나 열지 않은 을씨년스러운 공원의 고요함이 기대보다 낯설었다.

흐린 하늘과 안개에 잠긴 에펠탑. 그 앞에 펼쳐진 드넓은 잔디 광장은 사람 하나 없이 텅 비었다. 그 덕에 고요하고 약간 쌀쌀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c)밀린 일기



적당히 산책 후 부랴부랴 숙소로 돌아와 몽파르나스역으로 향했다. 순례자 사무실에 도착한 순서에 따라 등록해야 하고 이튿날 출발 일정을 생각하면 너무 여유를 부릴 순 없었다.


This is a zoo!

몽파르나스역은 너무 복잡하고 정신없었다. 그나마 익숙했던 영어가 사라진 안내판은 혼란만 부추겼고 어찌어찌 찾은 승강장에는 타야 할 기차 정보가 없어 당황스러웠다. 형광 조끼를 입은 안내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곁에 있던 승객이 프랑스어-영어 통역을 하며 도와주셨다. 콧대 높은 파리지엥에 주눅 들어있던 차에 보상을 바라지 않는 친절은 하 반가웠다. 열차 출발시간을 몇 분 앞두고 전광판에는 너무 오래 봐서 익숙해진 열차 번호가 떠올랐다.

혼돈의 몽파르나스역. 승강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 나처럼 전광판과 티켓, 핸드폰을 번갈아 바라보며 우왕좌왕이었다. 누군가 이렇게 외쳤다. This is a zoo! (c)밀린 일기



옆자리

몽파르나스역을 출발해 바욘에서 환승하는 여정이었다. 커다란 배낭을 메고 자리를 찾아 헤매자 옆자리 승객이 친절하게도 자리를 비켜주고 짐도 들어다 주었다. 첫날부터 감동받을 일 투성이다. 멋들어진 슈트를 빼입은 그는 이동장 안 고양이와 여행 중이었다. 대화를 나눌 순 없었지만 고양이에게 살살 녹는 표정을 보며 말할 수 없는 동질감과 인류애가 피어올랐다. 훈훈한 시작이다.


배낭

파리에서 출발할 때는 잘 차려입는 사람들이 많아 순례자들을 구분하기 어렵지만 바욘에 도착하면 얼핏 봐도 순례자들이 지천이다. 역에 내려 대합실 밖에서 크레페를 사 먹었다. 에펠탑, 크로와상, 크레페. 파리에서 원했던 체크리스트를 모두 긋고 최종 목적지행 열차에 올랐다. 유럽인 순례자들도 자국에서 바욘으로 넘어와 생장 삐에 드 뽀로 향하는 듯했다.

배낭 무게는 초보 순례자들의 화두였다. 하얗게 머리가 센 아저씨는 17킬로, 그 앞에 미국인 아저씨는 12킬로. 길을 걷는 도중에 짐을 줄이게 되니 괜찮다고는 하셨지만 내 짐이 7킬로라는 말에 대뜸 I hate you라고 익살스럽게 대꾸했다.

열차에는 자리마다 순례자와 배낭이 함께였다. 태어나 처음 만난 사람들과 가슴을 콩닥이며 눈빛을 빛내는 설렘과 인사를 나눴다. 아름다운, 정말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c)밀린 일기


조개

역에서 내려 순례자의 길로 향하는 방향은 사람들의 흐름에 몸을 맡기면 되었다. 모두가 제 몸만 한 가방을 멘 채 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순례자 사무실에서 수속을 마치고 제이콥의 조개를 걸친다. 이제부터 이 땅이 끝나는 별들의 들판(Santiago de compos tella)을 향해 걸어갈 것이다.

머무른 숙소 벽을 따라 주요 경유지가 적혀있었다. 여기서부터 761킬로미터. 존의 발끝에서 세상의 끝까지 매일 조금씩 가까워질 것이다. (c)밀린 일기



첫 번째 알베르게

알베르게는 전쟁터다. 콘센트 쟁탈전, 샤워실 눈치 게임, 인종과 성별을 초월한 코골이, 모기와 벼룩. 온갖 체취와 냄새로 가득 찬 순례자의 방이었다. 여권에 첫 도장을 받고 내일 먹을 간단한 간식거리를 챙겼다. 우비를 챙기지 못해 근처 가게에 들렀는데 샀는데 자그마치 30유로였다. 저렴한 건 6유로면 사는 걸 바가지를 썼지만 깨닫고 보니 이미 늦었다. 장비 빨 세우는 셈 쳐야지. 속상한 마음을 뒤로하고 마을을 둘러볼 수 있는 전망대에 올랐다. 잠시 지금 있는 곳이 현실인가 꿈인가 곱씹었던 광경이다.

붉은 담벼락과 반들반들한 돌길이 인상적인 마을. 그러나 내일 피레네 산맥을 넘어가면 프랑스가 끝날 것이다. (c)밀린 일기



질문

방으로 돌아와 짐을 두고 숙소를 나와 저녁 먹으러 갔다. 땅거미도 내리지 않은 저녁인데 가게들이 금방 문을 닫았다. 이층 침대 인연으로 알게 된 타카와 맥주잔을 기울였다. 우핑과 알바로 경비를 마련한 타카는 일본에서 자란 캐나다인이었다. 어디서 왔니, 왜 왔니, 어떻게 왔니. 어쩌면 앞으로 수백 번도 더 할 첫 질문에 답했다. 만나는 모든 이들이 길에 물음을 던지고 그 위에서 제 몫의 답을 찾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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