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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린 일기 Nov 07. 2020

(#066) 2018. 9. 14.

Roncesvalles 27.1km

순례자의 길은 유럽 어디서든 출발할 수 있고 한다. 길에서 만난 유럽인 순례자들은 집 근처에서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노란 이정표와 제이콥의 조개 상징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길이자 세계인들이 곧잘 찾은 프랑스길 첫날부터 난관이었다. 종일 걸음에 익숙하지 않은 다리에 무거운 배낭을 지고 1,400미터의 피레네 산맥을 넘어야 한다. 험한 코스는 동키 서비스를 이용해 배낭을 미리 보내는 사람들도 있지만 첫 여정인만큼 온전히 완주하고픈 욕심이 컸다. 챙겨 온 등산스틱을 손에 단단히 끼고 한 달 두발 발걸음을 옮겼다.


아침 여섯 시. 첫 여정을 추스르면 하나 둘 깨어나는 사람들과 뒤섞여 길을 나섰다. 모두가 낯설지만 같은 길을 걷는 순례자라는 생각에 만나는 사람마다 눈 마주치면 인사하고 행운을 빌어줬다. 오라손 산장을 중간 기점 삼기로 했다. 어슴푸레하게 밝아오는 해가 산기슭을 붉게 물들 무렵, 산탄데르에서 왔다는 스페인 부부 게르만과 베니를 만났다. 일출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드렸는데 스페인어만 하셔서 더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해 아쉬웠다.

생장 삐에드뽀에서 출발 일자가 비슷하면 하루 이틀 간격으로 만났던 이들을 또 만나는데 이렇게 잠시라도 스치면 그 인연은 이 길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는 것을 아주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산장에서 마신 카페콘레체와 유럽에 가면 먹어야지 벼르던 납작 복숭아. 입국 비행기에서 받아 챙긴 초코파이까지, 오래오래 기억할 첫날 아점이었다. (c)밀린 일기



피레네 산맥까지 도착하는 길에 구름과 안개가 짙어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세계에서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나와 동종 업계에서 일하다 자신을 찾으러 왔다는 순례자, 가장 힘든 구간을 오르며 만난 차비, 아일랜드에서 온 쾌활한 몰리, 내공이 느껴지는 프랑스인 할머니 할아버지 무리. 올리브를 나눠주셨던 북유럽 대사님, 도중에 잠시 합류한 멜리나(이미 한 달을 걸어 총여정이 장장 1,800킬로 미터라고 들었다!). 산길에서 만난 순례자들과 말을 나누면 길에서 오는 피로가 잠시 가셨다. 엎치락뒤치락. 경쟁하지 않는 경주는 서로를 보듬고 달래며 만나면 반갑고 떠나면 아쉬운 인연을 계속 낳는다.

구름이 덮히고 잠겼다 바람이 불면 드러나는 산 정상에는 양들의 목에 달린 종이 울었다. (c)밀린 일기


론세스바예스는 커다란 수도원이 공공 알베르게이고 선착순으로 접수하기 때문에 늦으면 낭패다. 호텔을 잡거나 아니면 10km를 더 걸어 다음 마을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산길이 끝나자 천근만근 같던 발도 좀 쉴 수 있었다. 산행이 고되어 틈틈이 양말까지 벗고 발에 환사도 시켜주고 자주 주물러 주었다.


세시쯤인가 접수처에 겨우 도착했다. 대기줄은 길었고 자리가 나갈까 전전긍긍하며 순례자 여권을 챙긴다. 기다리는 동안 길에서 만났던 한국인 무리와 인사를 나누며 다른 일행과 동행인들의 안부를 묻는다. 방을 배정받고 보니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는 강당처럼 넓은 공간에 침대가 빼곡한 형태였다. 생장에서 같은 방을 썼던 코골이 심한 줄리안이 근처에 없는 걸 확인하고 안도했다.

론세스바예스 알제르게 전경. 내부 운영은 수도사겸 봉사자들이 하고 있다고 들었다. (c)밀린 일기



저녁 식사 전에 시간이 남아 간단히 목을 축이기로 했다. 산길에서 만난 한국인 분이 흔쾌히 맥주를 사주셔서 공으로 먹는 호사를 누렸다. 목적지에 도착한 사람들의 표정에는 여유가 넘쳐 뒤늦게 도착한 이들을 맞이했다. 숲길을 빠져나와 일행이 연락도 안된 채로 만나지 못해 다시 산길을 올라갔다던 누군가도 다시 만나 안부를 물을 수 있었다. 다섯 시가 넘어 도착한 이들은 알베르게에 자리가 없어 다음 마을로 향했다.


바에서 만난 프랑스인 마리는 아버지와 함께 순례자의 길을 걷고 있었다. 기약 없는 일정이지만 얘기를 나누다 보면 사람들은 금세 마음을 열고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경계와 불안은 사라지고 신뢰와 우정이 샘솟는 아름다운 시간이다. 오라손 산장 입구에서 만났던 스페인 부부도 다시 만났다. 기념 삼아 함께 사진을 찍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는 얼굴이 늘어갈 생각에 설렜다.


기대했던 뜨거운 물 샤워는 없었지만 개운하게 씻고 빨래도 정리하니 몸이 한 결 가벼워졌다. 저녁은 순례자 전용으로 준비된 식당에서 먹을 차례였다. 걸으면서 만났던 인연과 대화를 곱씹으며 다 함께 와인잔을 기울였다.

스페인 생맥주가 이렇게 맛있을 줄 꿈에도 몰랐다. 특히 레몬 소다를 넣은 새르바챠 콘 리몬은 절대 잊을 수 없는 맛이다. (c)밀린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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