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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린 일기 Nov 08. 2020

(#067) 2018. 9. 15.

Zubiri 26.2km

산 아래 수도원만 덩그러니 있는 론세스바예스에서 출발할 때에는 손전등이 필수였다. 헤드라이트나 핸드폰으로 불을 밝히며 어두운 밤길을 걸었다. 어제 산행에서부터 잠시 일행이 된 분과 함께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섰다. 여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도 사위가 어두운 걸 보니 일출이 늦은 편인 것 같다. 때때로 올려다본 하늘에 쏟아질 듯 흩뿌려진 별들이 아름다웠다.


인적 드문 길과 들판을 가로질러 걸으며 틈틈이 지도로 위치를 확인했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길에 간간히 보이는 이정표와 노란 화살표에 의지하는 길은 다소 불안했다. 발걸음을 옮겨 딛는 곳이 곧 길이라지만 안개마저 껴 좁은 시야에 방향을 가늠할 수 없어 우왕좌왕이었다. 나처럼 길을 헤매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웅성이는데 멀리서 순식간에 가까워진 영국인 남녀 순례자가 명쾌하게 방향을 안내해줬다. 어려움에 처하면 불현듯 도움의 손길이 달려오는 까미노 데 산티아고다.

동이 튼 후 지나던 마을 건물들이 인상적이었다. 프랑스 양식이 조금 남은 듯한 건물들은 모두 외관에 꽃을 장식해두어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작은 감동을 주었다. ©밀린 일기



주비리

주비리에 도착해 찾은 알베르게는 출발지에서 여기로 오는 순례자들의 모습이 아주 잘 보였다. 체크인을 마치고 씻고 빨래를 털어 말리며 속속 도착하는 동료 순례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부엔 까미노! 그러면 그들도 화답하듯 힘차게 손을 흔든다.

함께 방을 머무는 한국인 순례자와 대화를 오래 나눴다. 그도 나처럼 정든 직장을 떠나 마음을 정리하러 온 듯했다. 안되면 되게 하라는 리더의 생각을 끝내 바꾸지 못했고 온 마음을 다해 일군 직장에서 자리를 잃었을 때 서운함과 허무가 무척 깊은 듯했다. 한편으로는 그런 일들을 털어버리기 위해 그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이 자리가 조금 괴롭고 피곤하게 느껴졌다.


클라우디아

스페인은 시에스타가 있어서 시간을 잘못 맞추면 가게가 모두 문들 닫는다. 부랴부랴 마을 중심으로 내려와 노상에서 샌드위치와 맥주를 주문했다. 홀로 온 여행객들은 합석을 하기도 하는데 독일에서 온 클라우디아를 알게 되어 함께 수다를 떨었다. 까미노 데 산티아고는 2년 전 남편과 함께 찾았었는데 지금은 혼자가 되어 캠핑카로 여행 중이란다. 독일에서 출발해 프랑스를 지나 지금은 스페인이고, 뒤이어 포르투갈까지 갈 예정이라고 했다. 차에서 생활하는데 가스가 떨어질까 봐 난방을 제대로 못해 환경이 썩 훌륭한 편은 아닌 것 같다. 어쩌다가 결혼 이슈도 이야기를 하고 어떤 나라를 다니는지, 어떤 언어를 할 수 있는지 등을 물어봤다. 어쩌다가 나이를 묻자 나이는 먹을수록 모르는 게 좋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유쾌하고 즐거운 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클라우디아와 얘기하는 중간에 건너편 스페인 꼬맹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Lovely를 연발하며 우리는 함께 아이들의 사진을 찍어 남겼다. ©밀린 일기



로돌프

숙소로 돌아와 잠시 쉬는데 우리 방을 함께 쓰는 다른 순례객들도 속속 도착했다. 내 아래층에 머무는 로돌프는 영어를 아주 잘하셨다. 발이 너무 상하는 바람에 며칠 더 쉬어가신다고 하셨는데 지팡이도 직접 나무를 깎아 만드신 걸 사용하신다고 했다.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모든 인생에 저마다 사연이 있다. 순례자의 길을 찾는 이들은 대부분 어떤 변화와 답을 원하는 상황이므로 그 사연들을 듣다 보면 공감도 가고 마음이 쓰여 이토록 무구한 경험을 대화로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이 문득 감사해졌다.


재회

시에스타가 끝나고 이른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산 정상에서 만났던 차리를 다시 만났다. 핸드폰을 겨우 고쳤다고 들었는데 나는 인터넷만 가능한 유심을 사용 중이라 아쉬운 대로 이메일만 교환했다. 스페인 사람들도 프랑스 사람들처럼 반가움을 포옹이나 비쥬로 표현한다. 오며 가며 눈에 익은 사람들과 제스처로 대화하는 차리의 모습이 조금 낯설었다. 스페인 부부 게르만과 베니도 다시 만났다. 자주 보니 연락처를 교환해 길 위에서 계속 연락하기로 했다. 나는 영어를 스페인어로, 그들은 스페인어를 영어로 번역해 다소 서투르게 의사소통을 했다. 스페인어를 꼭 배우라며, 순례자의 길이 끝나면 집으로 초대해주겠다는 말을 남겼다. 모든 이의 초대와 환영을 받는 발걸음은 감격스럽기만 하다.

저녁 식사를 하던 식당에서 적포도주를 한 잔 시켜두고 연신 담배를 피우는 창 밖의 남자는 거친 인상과 커다란 문신에 분위기가 범상치 않아 자꾸만 눈이 갔다. ©밀린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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