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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린 일기 Nov 09. 2020

(#068) 2018. 9. 16.

Pamplona 21km

길에는 만난 사람 중에는 아픔을 이겨낸 이들이 참 많다. 병, 상실,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걸으며 자신을 다독이고 파도처럼 밀려왔다 떠나가는 사람들에 마음을 녹이고 위로받는다. 하와이에서 온 존은 암 치료의 우울함을 극복하려 까미노를 걷는다고 했다. 겸사겸사 애인을 만들고 싶다는데 사랑이 넘치는 길에서는 가끔 커플이 만들어지기도 하니 좋은 인연 만나 시라 빌어드렸다. 존이 말했다. 길에서 받는 정신적인 에너지와 사람들이 주는 힘을 믿는다고. 나도 그 말에 깊이 공감했다.

졸혼 후 하고픈 일들을 하나 둘 이루신다는 한국분을 만났다. 은퇴 후 농작물을 기르며 귀농한 지 2년 차. 귀국하면 놀라오라던 말을 잊지 않고 이듬해 겨울 만나러 갔었다.

이따금 만나는 순례자들을 위한 우물. 역사가 아주 오래된 것부터 때때로 물이 아닌 포도주가 나오는 것까지 다양하다. (c)밀린 일기



주비리를 거의 다 빠져 나왔을 무렵, 관절마다 붕대를 휘감고 힘겹게 발걸음을 떼는 노년의 순례자를 만났다. 여든 살에 백발이 성성한 그는 이미 까미노의 유명인사였다. 모두가 한 마음으로 그의 무사 도착을 기원했다. 그는 내가 까미노에서 만난 사람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다.

마을을 몇 번쯤 지나 만난 휴게소에서 만난 독일인 리디아. 마침 동네 고양이들이 모여 순례자들이 나눠준 점심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리디아는 집에 치즈와 고등어 두 마리를 키우고 있어 고양이들 생각이 많이 난다고 한다. 가족을 두고 온 사람들은 틈틈이 그리움에 잠겨 눈이 흐려졌다.

시에스타를 즐기는 고양이들은 정말로 행복해보였다. 빵 부스러기를 나눠주는 리디아도 행복해보였다. (c)밀린 일기



코 끝을 스치는 낯선 향이 현재를 깨운다. 덤불에 맺힌 온갖 베리들과 포플러가 자라난 오솔길은 이방인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 향에 꿈결을 헤매다가도 문득 낯설어 아, 나는 새로운 곳에 있었지 하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신혼여행을 까미노로 왔다는 인니계 호주 사람 힐러리와 대니얼. 힐러리가 남편이고 대니가 아내라 이름이 반전된 것 같아 신기했다. 알고 보니 자주 듣는 얘기라고. 호주에 유학 갔던 대니는 힐을 만나러 다시 돌아갔고 둘은 오랜 연애 끝에 신혼부부가 되었단다. 어떤 책을 읽고 영감을 받아 순례자의 길을 꿈꿨는데 이에 마음이 동한 대니도 찬성해 함께 여행을 왔다. 나와 여행 동기가 같아 우리는 금세 친구가 되어 떠들었다. 완주 후 유럽 몇 곳을 돌고 집으로 갈 예정이라고 한다. 부부는 홈페이지로 여행기를 업데이트하고 있었고 내게도 방명록을 부탁했다.

들판을 헤매다 건물이 빼곡한 길로 들어서자 괜시리 반가웠다. 사람 난데서 자란 사람은 이렇게 도시가 그리워지는 것 같다. (c)밀린 일기



오늘은 피레네와 쥬비리보다 더 힘들었다. 빌라바르를 통과해 팜플로나에 도착했을 때는 진심으로 울고 싶었다. 발고 너무 아프고 다리도 무거워 겨우 마지막 걸음을 떼었다. 한 발자국도 딛기 힘들어 입구에서 조금이라도 가까운 알베르게를 잡았다. 호스트 아나벨은 마이 달링이라며 이것저것 챙겨주었다.


저녁은 중국 상점에서 찾은 안성탕면이었다. 소시지 여섯 개에 안성탕면 세 개를 둘이서 순식간에 비웠다. 해외에 나오면 원기보충은 라면이 제일인가 보다. 원래 계획은 고추장 삼겹살이었는데 스페인식으로 염장된 고기는 너무 간간해서 감자를 볶아 곁들어야 겨우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때우는 한국인에게 만족스러운 한끼다. 아나벨에게도 나눠주니 빵을 챙겨주며 오는 정을 보였다. 모처럼 도시의 소리에 기분 좋게 잠드는 밤이다.

라면 세개를 끓이는 건 처음인데 물도 기가막히게 맞추어서 무척 맛있었다. 시장이 반찬인 우리는 순식간에 식사를 마쳤다. (c)밀린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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