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밀린 일기 Nov 10. 2020

(#069) 2018. 9. 17.

Puente la Reina 24.2km

팜플로나는 까미노에서 만난 첫 번째로 큰 도시였다. 한적한 마을과 다르게 일상을 깨우는 소음과 사람들이 있는 도시의 모습은 이전과 달랐다. 순례자들은 여권을 가지고 알베르게, 성당이나 교회 그리고 대학 등 일부 지정 시설에서 도장을 받을 수 있다. 나중에 순례자 여권에 찍힌 도장으로 지나온 길을 확인하고 후일 증명서를 받는 식이다. 이른 아침 알베르게를 출발해 대학의 순례자 사무소를 먼저 찾았다. 시에스타를 의식한 탓인지 동도 트지 않을 무렵 등교하는 학생들이 꽤 되었다. 깜깜한 눈을 비비며 길을 헤매다 겨우 발견한 사무소에서 도장을 받을 수 있었다.

사무소도 문을 열기 전이라 근처를 배회하며 시간을 보냈다. 도장을 수집하는 것도 또 하나의 즐거움이라 놓칠 수 없었다. (c)밀린 일기



피레네 산길에서 만난 동행과는 여기서 작별하기로 했다. 처음부터 일행이 아니었으므로 오며 가며 무리가 되었다 흩어졌다 할 따름이었다. 다리가 많이 아프셔서 일정을 걱정하셨는데 서로의 무사 도착을 기원하며 길을 나섰다. 도시에서 멀어지며 다음 여정지인 용서의 언덕을 향해 나아갔다.


팜플로나를 출발해 다음 여정으로 떠나는 길의 중반 즈음. 풍력 발전기와 금속 설치물이 인상적인 용서의 언덕(Alto del Perdon)이 있다. 야트막하지만 쉼 없이 이어지는 길을 오르다 네덜란드인 한스를 만났다. 순례자의 길은 신념을 가진 이들만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하는 보수적인 사람이었지만 비올라를 연주하고 걸음에서 음률을 느끼는 낭만적인 모습도 있었다. 그와는 근처 마을에서 점심까지 함께했다. 순례자는 조촐한 아침과 점심을 먹은 후 저녁에 만찬을 즐기는데 관례라지만, 모처럼 쉴 수 있는 기회를 쉬이 놓치긴 어려웠다. 한창 점심때라 자리가 있는 곳을 찾아 헤매다 겨우 앉을 수 있었다.

스페인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용서의 언덕에서 다들 자신을 용서한다고 한다. 오른쪽은 흥얼거리며 발걸음을 내딛던 한스. (c)밀린 일기



여왕의 다리(Puente la Reina)로 향하는 여정은 고통스럽기 짝이 없었다. 오르막길은 정신력으로 어찌어찌해나갔지만 내리막길 돌밭은 계산 착오였다. 7kg 배낭은 중력에 따라 착실하게 무거워졌고 요령 없는 무거운 발걸음은 무릎에 무리를 주었다. 내리막길을 다 내려와서는 등산스틱에 의지해 거의 울다시피 내려왔다.

발을 질질 끌며 도착한 숙소에서 가지고 있던 온열 찜질팩을 붙였는데 이상하게 통증이 사그라들기는커녕 과열되었다. 알고 보니 열이 오른 염증은 찬 기운으로 식혀야 했고 요령 없이 대뜸 캅사이신 파스부터 붙인 부작용이었다. 결국 한 걸음도 옮기기 힘든 지경이 되어서야 구세주처럼 물리치료사를 만났다. 까미노를 여러 번 찾았다는 하비에르의 마사지로 오늘 밤은 겨우 넘길 수 있을 터였다. 눈물을 흘리며 주저 안고 싶었던 자리에 손을 끌고 일으켜줄 행운과 기적이 도처에 걸린 까미노다. 평생 마음이 동하지 않던 누군가의 계획에 마음이 열릴 지경이다.

까미노 끝까지 이어진 소중한 인연을 만났던 푸엔테라레이나의 알베르게 (c)밀린 일기


매거진의 이전글 (#068) 2018. 9. 16.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