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밀린 일기 Nov 11. 2020

(#070) 2018. 9. 18.

Estella 21.7 km

하비에르의 마사지가 꽤나 통했다. 지난밤 낯선 사람이 다리를 주무르는 기분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지만 사정을 가릴 처지가 아닌 데다 치료사인 그를 믿고 맡겨두었다. 양 무릎은 여전히 시큰거렸지만 스틱과 이럴 줄 알고 챙겨 온 보호대가 제 할 일을 할 차례였다. 한스가 알려준 등산스틱 잡는 법, 누군가 알려준 등산화 제대로 신는 법, 진통제에 의지하기보다 몸의 소리를 듣는 법, 하비에르가 알려준 틈틈이 스트레칭하고 무릎 염증을 관리하는 법. 길에서는 배움이 끝이 없다. 더듬더듬 스페인어를 배우고 전 세계 사람들을 만나며 저마다의 사연 속에서 교훈을 얻는다. 온전히 나를 발견하기 위해 떠나온 길에 세상을 발견하는 기쁨이 가득 찬다.

지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길가에는 앞서간 이들의 통찰을 담은 글귀가 틈틈이 마음을 달군다. (c)밀린 일기



어제 알베르게에서는 이 여정이 끝날 때까지 지속될 뜻깊은 인연을 만났다. 식품공학을 전공한다는 독일인 대학생 요한나, 빌바오에서 온 물리치료사 하비에르, 미국에서 언론인 겸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루이스. 하비에르는 두세 번쯤, 루이스는 벌써 다섯 번째로 까미노를 찾는다고 한다. 친구인 둘은 휴가를 내고 까미노에 오는 일이 매우 익숙해 보였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 길을 다시 찾는 행운은 또 얼마나 기꺼울까. 부러운 우정이다.

푸엔테라레이나를 떠나며 만난 여왕의 다리. 왕가의 역사를 간직한 옛 대국에는 시시때때로 빛나는 역사의 유물이 순례객들을 반기며 우리가 여행자임을 일깨운다. (c)밀린 일기



길가에 드리운 커다란 나무 그늘이나 개울가는 순례자들의 사랑방이자 쉼터가 되어준다. 여기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눈인사를 주고받던 이들이 한데 보여 정답게 말을 섞는다. 세상에 당신이 존재하는 지조차 몰랐던 사람들이 살뜰히 끼니를 걱정하고 안부를 묻는다니, 흩어졌던 인류애는 죄 여기 다 있는가 보다. 부상이 염려되니 발을 잘 말리라, 쉴 때는 여기를 마사지해줘라. 각자 길에서 주워 모은 지혜를 나누며 오늘도 부엔 까미노! 를 외친다.

물에 발을 담근 이들은 이제서야 시라우키 다리에 도착한 이들에게 손짓하며 쉴만한 물가를 내준다. 하비에르, 루이스, 요한나, 필의 그리운 뒷 모습. (c)밀린 일기



오늘은 루이스가 점심을 샀다. 스페인에서 먹은 첫 빠에야인데 굶주렸던 만큼 너무나 맛있었다. 루이스는 이 기름진 볶음밥에 마요네즈를 얹어 먹었는데 이제와 말이지만 고소한 감칠맛이 꽤 일품이었다. 요한나와 하비에르가 경악한 것은 너무나 자명했다.


목적지에 도착해 첫 타파스에 맥주로 가볍게 입가심을 하고 저녁은 푸짐한 샐러드에 적포도주를 먹었다. 술에 취해 요한나와 과거의 남자에 대해 떠들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자세히 나지 않지만 흑역사 자랑대회였던 듯하다.

오늘은 유스호스텔에서 묶었는데 여자화장실을 찾지 못해 남자 화장실에서 함께 씻었다. 칸막이가 설치되어 있고 시간을 정해 문을 잠근 채로 씻긴 했지만 젠더의 문제가 아니라 위생과 휴식의 문제에 핵심이 닿자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공간을 나눠 썼다며 아저씨들이 더 성화였다. 그러고 보니 오래된 알베르게 중에는 실제로 남녀가 한 공간에 씻는 곳도 있다고 한다. 혼숙은 비일비재함으로 같이 씻는 정도가 되어야 모두가 뜨악하는 분위기다. 그 외에도 세탁비나 건조비를 아끼기 위해 곧잘 사람을 모아 빨래를 함께했다. 하지만 샤워하는 사이 잘 마른 세탁물을 차곡차곡 개켜놓은 루이스의 섬세함은 조금 부담스러웠다.

점심-저녁1-저녁2. 가볍게 먹고 싶어도 그러기 쉽지 않은 스페인 요리는 너무나 맛있다. (c)밀린 일기



도중에 장장 9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성에 들렀다. 내부는 신비로우며 동시에 경건했고 세월에 닳은 커다란 돌들은 모서리가 조금 마모되었을지언정 토대는 강건했다. 때때로 깊은 신앙심을 가진 사람들이 기도드리는 모습을 보면 나마저도 성스러운 기운을 느꼈고 묘한 안식을 얻곤 한다.

이 마을 초입에서 게르만과 베니 부부를 다시 만났다. 할 줄 아는 스페인어가 하나 둘 늘어가면 이 부부를 만나 짧은 대화를 나눴다. 아는 사람이 많아지고 걸어온 길이 길어질수록 내 흔적도 여로에 진하게 남는다.

시간에 낡아가지만 고풍스러움을 더하는 건물에 일몰의 황금이 차오른다. 계단을 오르는 걸음은 괴롭지만 풍경은 찬란했다. (c)밀린 일기


매거진의 이전글 (#069) 2018. 9. 17.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