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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린 일기 Nov 12. 2020

(#071) 2018. 9. 19.

Sansol 28.1km

에스테야를 조금만 벗어나면 이라체 수도원에서 포도주가 솟아나는 우물을 만난다. 수도사들이 순례자들을 위해 마련한 포도주인데 조금만 늦어도 앞서가는 선객들에 치여 맛보기조차 어렵다. 생장부터 달고 온 순례자의 표식, 제이콥의 조개에 몇 모금 와인을 담아 목을 축인다.

탭에서 생맥주 따르듯 포도주를 따라 마시는 순례자들. 지친 몸과 마음에 향긋한 주향에 취해 금방 시선이 이지러진다. 한적한 시골 길을 흐느적거리며 걸렀다. (c)밀린 일기



게르만과 베니 부부 못지않게 자주 만나는 빅토르와 테오 아저씨. 테오는 디오스라는 신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무릎이 아파 절뚝이자 또 스스럼없이 마사지를 해주셨다. 스페인 사람들이 정이 넘치는 것은 정말 좋지만 대중없는 손길은 자주 당황스러웠다.

황량한 산길을 지나며 단비같이 만난 쉼터. 카페콘레체를 한 잔 마시는데 정면에 빅토르와 테오 아저씨가 보였다. (c)밀린 일기



순례자 여권에 쎄요(도장)을 받으러 지나던 마을의 작고 오래된 교회에 들렀다. 신앙이 없을지언정 신념을 가진 사람으로서 고요한 분위기에 잠겨 마음속으로 무사 완주를 빌었다. 심신이 지치면 작은 자극에도 금방 반응이 온다. 길가에 핀 꽃 한 송이, 사람들이 힘내라며 남긴 글귀에 눈물이 울컥 차오른다. 마음을 잔잔히 가라앉히고도 진정이 되지 않자 교회를 지키던 이에게 진한 포옹을 받았다. 스페인어를 알아들을 수 없어 아쉬웠지만 그가 전한 말 중에는 분명 사랑(아모레)이라는 단어가 있었다.

켜켜이 쌓인 먼지와 낡아서 삐걱이는 의자, 칠이 바랜 성화, 세월에 닳아 이가 빠진 아치. 외롭게 강당을 지키던 늙은 성도가 있던 작은 교회 (c)밀린 일기



까미노가 늘 들판이나 강가를 걷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도시를 통과하고 아스팔트 고속도로를 지나며 풀 한 포기 없는 황무지를 지난다. 삼분지 일은 육체와의 싸움인 까미노. 요령 없는 걸음의 여파로 여전히 욱신거리는 무릎을 다독이며 짐을 미리 보내두기로 했다. 누군가는 반칙이라며 역정을 내지만 제 몸을 잘 보살피며 완주하는 편이 훨씬 이로울 것 같아서 지금은 명분을 논할 때가 아니었다.

로스 아르코스를 벗어나 산솔 가는 길에 만난 황무지. 오른쪽은 포도나무 왼쪽은 황야나 다름 없었다. (c)밀린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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