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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린 일기 Nov 13. 2020

(#072) 2018. 9. 20.

Logroño 20.1km

어제 머문 산솔은 황무지에 불쑥 나타난 오아시스 같은 작은 마을이었다. 순례자들은 보통 이 마을 전이나 다음 마을을 주로 거쳐간다. 요한나와 나는 까미노를 몇 번이나 찾았다는 하비에르와 루이스의 말을 믿고 무작정 길을 떠났다. 서로가 언제 도착하는지 모른 채 길에서 헤어졌지만 그 작은 마을에서 다시 재회하리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나선 길이었다.

산솔에서 출발해 새벽녘에 닿았던 토레스 델 리오. 이 작은 마을 지나면 로그로뇨까지는 오로지 길 뿐이다. (c)밀린 일기



무릎이 아픈 뒤로 몸의 이곳저곳이 고통을 분담하다 보니 발가락 끝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애초에 신성한 의미로 떠나는 고행길이지만 내 몸의 무게를 책임지고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떠나야 한다. 우리말로 인사를 할 줄 알던 이탈리아인 조쉬를 도중에 만났다. 호리호리한 체격인데  커다란 가방을 짊어지고 도인처럼 잘도 걸어 다녀서 신기했다. 기운이 떨어지는 내게 응원의 말도 잊지 않았다.

해가 떠오르며 아침노을이 진다. 흙과 풀 뿐인 주변에 붉은빛이 진해지면 길목에 서서 잠시 숨을 고른다. 넋을 놓고 있다가 만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온 목사 대니얼이 길 한복판에서 기도를 해줬다. 같은 짐을 이고 고통에 찬 몸 위에 축복이 쌓인다.

깜깜한 아침에 출발해 도중에 떠오르는 해를 보는 건 상상보다도 더 큰 기쁨이었다. 해가 높아질수록 마음 속에 충만한 감정이 차오른다. (c)밀린 일기



지난 인연을 재회하면 생이별한 가족을 다시 만난 듯 반갑다. 쥬비리에서 같은 방에 묶었던 로돌프를 다시 만났다. 다리 상태가 심각해 부르고스에 도착하면 며칠 쉰다고 한다. 경쟁하지 않는 여정이므로 시간만 허락한다면 얼마든지 걷다가 멈출 수 있는 까미노다. 그에게 행운을 빌며 헤어졌다.


낯선 이의 축복 기도, 가끔 만나는 거리의 악사들과 함께 지친 발걸음에 힘들 실어주는 것은 길거리에서 발견하는 문구들이다. 벽이나 이정표, 돌이나 작은 메모지에 써 붙인 것까지. 지나가다 만나면 단숨에 눈물이 차오르는 응원들. 온 세상이 보잘것없는 존재를 지켜봐 주고 있다는 감각을 잠시 느껴본다. 한껏 부푼 마음으로 고속도로를 따라 걷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지나는 트럭 운전사가 순례자에게 격려의 손키스를 날린다. 요한나와 나는 잔뜩 들떠 양손으로 쪽쪽거리며 화답했다. 경계가 무너진 친절은 타인과의 거리를 단번에 좁혔다.

로그로뇨를 코앞에 두고 잠시 멈춘 숲길에서 발견한 글귀. 우리 모두는 생각보다 강인하고 아름다운 존재다. 절대로 잊지 말것. (c)밀린 일기


주변에 포도나무가 잔뜩 보이는 것을 보니 이곳은 리오하 주가 틀림없다. 와인이 유명하다는 말은 허사가 아니었다. 전전날부터 일정을 무리하게 잡은 이유는 도착 날 한다는 와인축제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도시로 진입하는 다리를 앞두고 한 걸음을 떼기가 힘들었다. 내가 쩔쩔 매고 있자 지나던 순례객이 친절을 베푼다.


“도와줄까?”


사실 이 말은 까미노에서 부엔 까미노 다음으로 많이 듣는 말이다. 조금이라도 지쳐 보이면 온 세상 사람들이 걱정 어린 목소리로 주변을 살핀다. 제 몸만 한 가방을 진 이에게 차마 짐을 보탤 수 없어 감사 인사를 전하고 용기를 내서 천천히 발걸음을 뗐다.

저 다리만 건너면 꿀같은 휴식이 기다리지만 아치 하나를 건너는 일도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c)밀린 일기



로그로뇨는 타파스로 유명한 도시다. 심지어 타파스의 고향이라고도 들었던 것 같다. 팜플로나보다 훨씬 활기 넘치고 늦여름과 초가을을 앞둔 싱그러운 날씨에 와인이 아주 제격이었다. 공립 알베르게에 짐을 풀고 광장 근처에서 유명하다는 스페인식 오믈렛을 먹었다. 식당에 양해를 구하고 얻은 얼음주머니를 양 무릎에 올린 채였다. 알베르게에서 조우한 하비에르와 루이스가 주인에게 말해서 챙겨준 배려다. 모두 배를 적당히 채우고 성당 앞 광장에서 시작될 와인축제를 즐기기로 했다.

입장료를 내면 와인잔과 바우처를 나눠준다. 부스마다 돌아다니며 음료를 기울이고 타파스를 곁들이면 낮동안 고통스러웠던 시간이 휘발되고 무릎은 가벼워졌다. (c)밀린 일기



취기가 오르자 넘치게 흥이 오른 우리는 이참에 타파스 골목을 접수하기로 했다. 가벼운 핑거푸드를 제쳐두고 우리가 택한 건 맛집으로 소문난 양송이 타파스다. 좁은 골목에는 스탠딩 좌석이 줄지어 서있고 한 걸음 떼기도 어려운 길가엔 타파스 집이 한가득이다. 바게트에 갓 구운 양송이에 맥주를 곁들이자 세상이 별세계였다. 흥겨움에 취해 두 번째 접시와 두 번째 잔이 금방 채워진다.

타파스 골목을 접수하고 광장으로 돌아오자 와인축제는 파장 분위기였다. 축제를 하고 남은 와인은 무료로 나눠주고 있었는데 요한나와 냉큼 한 병식 챙기고는 순례자 무리와 뒤섞여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우리는 낮에 본 글귀, 사람들, 까미노의 의미 따위를 떠들며 눈물을 글썽였다. 볼썽사나운 취객의 주사였으나 진심이 전해진 공감대는 결코 볼썽사납지 않았다. 이때 만난 독일인 친구들은 가끔 다시 만나며 나중엔 쫑파티를 함께했다. 정신을 차리고 알베르게에 도착했지만 창밖에는 세상이 떠나가라 고성을 질러대는 흥겨운 술꾼들이 단 잠을 방해했다.

양송이 타파스와 타파스 골목. 엄혹한 시절인 지금 무엇보다도 그리운 광경이다. (c)밀린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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