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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린 일기 Nov 14. 2020

(#073) 2018. 09. 21.

Nájera 27.5km

까미노는 제이콥의 조개나 노란 화살표를 따라가면 방향을 찾는 데에는 문제없다. 아니면 길을 잃고 애를 먹은 선배 순례자들이 방향을 알리는 메모나 표식을 새로 남겨둔다. 공식적으로 표기된 곳도 있고 돌이나 주변 사물을 이용해 만들어두기도 한다. 사람들의 다정함이 곳곳에 배어 있어 길을 잃어도 결코 두렵지 않은 까미노다.

순례자들 간 인사말인 “부엔 까미노”가 도로 위에 새겨져있다. 자국이 희미해지면 덧씌우거나 새로 그려넣기도 하는 것 같았다. (c)밀린 일기



요한나와는 나헤라로 가는 도중 작별했다. 나 못지않게 그의 다리도 상태가 별로였다. 하루만 같이 걸어도 정이 쌓이는데 며칠 서로 의지하며 걸던 참이라 무척 아쉬워하며 서로의 무사 완주를 빌어줬다. 때론 각자의 시간이 필요하고 자기만의 속도를 지켜야 할 때가 있다.


리오하 주에는 정말 포도나무가 많았다. 드넓은 들판에 열 맞춰 자란 포도나무는 모두 와인 생산을 위한 것들이라고 들었다. 작고 탐스러운 알갱이들은 순례자들을 유혹한다. 그리고 작물에 큰 피해를 주지 않고 양심을 지킨다면 몇 알 정도는 순례자들을 위한 선물로 너그러이 주어졌다.

늦가을에도 이상고온으로 너무나 뜨거웠던 한 낮의 포도밭. 지날때마다 유혹이 찾아온다. (c)밀린 일기



로그로뇨에서 출발하는 도중에 지난밤 와인축제에서 깨어나지 못한 주정뱅이들의 인종차별 공격을 받았다. 까미노에서 인류애를 하도 채웠더니 이제 눈을 찢거나 중국인이라며 놀리는 것쯤은 별 것 아니었으나 곁에 있던 미국인이 나서서 변호를 해줬다. 정치적 올바름이 지금처럼 상용화되지도 않았을 때지만 그의 오지랖에 감동받아 우리는 잠시 길을 같이 걷게 되었다.

원래 간호사였고 이혼 후 대학도 새로 다니고 까미노에서 돌아간다면 코스타리카에서 농장을 하고 싶다는, 텍사스에서 온 미시. 내가 생각한 고리타분한 미국 남부 꼰대 모습은 전혀 아니었고 우린 고양이부터 트럼프 욕까지 온갖 이야기를 나누었다. 국경과 세대를 초월해 이토록 유쾌하게 수다를 떨며 함께 걸을 수 있어 정말 행복했다.

내가 무릎 때문에 절뚝이자 자기도 이미 넘어져 열 바늘을 넘게 꿰맨 상태라고 했다. 상태가 덧나지 않게 다리를 움직이면 안 됐으나 그 역시 까미노를 완주하고픈 소망은 나와 다르지 않았다.

나헤라에 도착해 근처에서 만난 작은 개울. 벌써 많은 순례자들이 발을 담구며 쉬고 있었다. (c)밀린 일기



알베르게에 짐을 풀고 다 같이 둘러앉아 간단한 저녁을 먹었다. 보통 식당을 가지만 이 날은 각자 식재료가 조금씩 있어서 와인이며 치즈, 빵과 디저트를 꺼내 함께 먹었다. 노르웨이 보거트는 술고래였고, 독일에서 온 로이와 반려견(?)과 함께 여행하는 애슐리, 이름 모를 스페인 사람 한 명, 그리고 학교를 휴직하고 여행 왔다는 독일인 티나까지. 우리는 아무렇게나 손에 잡히는 대화로 시간을 달궜다.

왕좌의 게임 중 최대 캐릭터, 중국인에 관한 농담(중국인이 동시에 점프를 하면 지진이 일어난다는 둥 다 함께 볼 일을 보면 해수면이 상승한다는 둥 실없는 소리가 태반이었다)부터 간단한 한국말까지 떠들며 알차게 시간을 보냈다.

애슐리는 까미노에서 생일을 맞는다고 했다. 우리는 미리 노래를 부르며 축하했고, 스스로에게 주는 생일 선물로 욕조가 있는 방을 선물했다는 그를 진심으로 부러워했다. 개인 화장실과 욕조가 있는 욕실은 까미노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호사였기 때문이다.

이 알베르게에서 하비에르와 루이스도 다시 만났다. 하비에르는 여지없이 내 무릎을 점검했고 나도 그새 약간 늘은 스페인어도 반갑게 화답했다. 유쾌하고 시끄러운 까미노의 밤이다.

술만 있으면 일행이 된다. 목함에는 애슐리의 반려견이었던(?) 재가 담겨있다. 우리는 잔을 부딪히며 그의 Ash Dog과 애슐리의 생일을 축하했다. (c)밀린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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