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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린 일기 Nov 15. 2020

(#074) 2018. 9. 22.

Santo Domingo de la Calzada 21.3km

어슴푸레한 새벽에 길을 나서며 청남빛 하늘이 밝아오는 모습을 본다. 빛의 산란으로 하늘의 색은 물론 다양하겠지만 살면서 이토록 다채롭게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유심히 본 적이 있나 싶다.

아침놀이 짙어지면 하늘이 눈깜짝할 새 파란색으로 물든다. 실루엣만 비치는 사물들이 파란 하늘 아래 그림 그리듯 능선을 이룬다. (c)밀린 일기



새벽녘 길을 나서다 어젯밤 와인잔을 함께 기울였던 티나를 다시 만났다. 독일에서 공립학교 교사를 하고 있고 지금은 1년 간 휴직계를 내고 여행 중이란다. 문제아 반을 맡고 있는데 쳇바퀴 돌듯 해결되지 않는 질문에 깊은 회의에 빠져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밖에 한국의 분단 현실에 관심을 보여서 동독과 서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꿈이든 통일이든 우리의 미래는 마냥 낙관적이지만은 않았다.

두 번이상 만나면 서로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며 지난 이야기들을 묻는다. 아침에는 조금 쌀쌀한데 늘 반팔과 반바지 차림이었던 티나. (c)밀린 일기



까미노에서 한국인을 만나면 사실 의식적으로 피했다. 초반 적응기를 제외하고는 일부러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다. 도망쳐오고 싶은 현실을 자꾸 상기하는 것이 두렵고 이왕 해외로 나온 김에 온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궁금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 길에서 만난 사람은 좀 달랐다. 성찰이 그를 길로 이끌었고 생각을 정리하러 온 점이 나랑 닮았다. 그는 묵주를 돌리며 지인들에게 부탁받거나 본인이 원하는 기도를 들이며 걸음을 걷는다고 했다. 소염 진통제와 무려 믹스 커피를 나눠주고 떠난 그. 함께 걷던 미시가 핫티 팟타디라는 애칭을 붙여줬다.



산토 도밍고 깔자다는 순례자들을 위한 병원과 숙박시설을 마련하며 유명해진 성인이라고 들었다. 공립 알베르게는 무척 넓었고 오랜만에 일찍 도착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이층 침대 중 일 층은 노약자에게 우대되어 나는 보통 이층에서 잤다. 오늘 알베르게는 역사와 전통이 오래된 탓인지 시설이 썩 쾌적하진 않은 편이라 밤새 굴러 떨어질 걱정이 되는 곳이었다. 옆자리에 마사지에 쓰라며 타이거 밤을 나눠주신 싱가포르 출신 신부님이 계셨는데 코골이가 어마어마해 다음날 아침 모두의 원성을 샀다.

순례자들의 피 땀 눈물이 기록된 신발들. 고행에 스민 냄새는 너무나 지독했다. (c)밀린 일기


산토 도밍고가 잠든 근처 성당에 잠시 들렀다. 성당에는 무고하게 처형될뻔한 순례자를 살린 ‘닭’이 상징물로 곳곳에 걸려있다. 고발의 순간 목이 잘린 닭이 되살아나 그의 무죄를 입증했고 이후 도시의 상징이 되었다고 한다.

빵가게에는 치킨 쿠키며 파이가 가득했다. (c)밀린 일기


저녁은 하몽을 올린 멜론과 와인이었다. 잠시 도시를 돌아다니며 군것질을 했더니 거창한 식사는 관심이 없었다. 까미노에서 최애 간식 두 개를 꼽으라면 그중 하나는 단연 이날 발견한 감자칩이다. 1kg에 1유로 안팎인 신선한 감자칩은 적당히 짭짤하고 아주 신선해서 이고 지고 다니며 순례자들에게 전파했다.


저녁 식사는 첫날 론세스바예스에서 만났던 파니의 아버지 루이와 함께 먹었다. 전형적인 파리지앵인 프랑스 특유의 억양이 강한 영어를 구사하는 데다 말이 아주 빨라서 알아듣기가 조금 힘들었다. 그는 의외로 한국을 잘 알고 있었다. 조선업을 하면서 울산이며 부산에 자주 출장을 다녔다고 했다. 사람들이랑 말을 나누면 생각보다 우리나라를 잘 알고 있어서 이렇게 놀랄 때가 많다.

몇 년 전 한국에서 유행한 커다란 캔에 담긴 감자칩에 비할바는 아니겠지만 감자칩에 맥주는 천상의 맛이었다. (c)밀린 일기



낮에 빨랫줄에 널어둔 빨랫감을 걷어오며 오늘은 일찌감치 잘 준비를 했다. 옛 도시 모습을 잘 간직한 산토 도밍고. 알베르게 창 밖으로 성당의 첨탑 부분 잘 보였다. 이따금 들려오는 웃음소리와 그치지 않는 코골이가 적당히 귀에 익을 때쯤 잠이 들었다.

완벽하게 깜깜한 밤 하늘에는 홀로 빛났고 해가 떠오를 무렵에는 실루엣만 보였던 산토 도밍고 성당의 첨탑. (c)밀린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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