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ghtme Sep 04. 2020

15년 우정을 마치며

 

 중학교 때부터 친했던 친구와 관계를 정리하려고 한다. 사실 진작에 끝났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인연이어서, 이렇게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했다는 게 더 신기할 정도이다.

 친구와 나는 성격도, 환경도 아주 달랐다. 나는 예민하고, 친구는 무던했고, 나는 말을 조심해서 하려고 노력하는 편이고, 친구는 친한 사이에는 말을 거침없이 했다.


 물론 아쉬움은 많이 남는다. 15년이라는 시간 동안 정이 많이 들었고, 중학교 때 친했던 무리 중에 유일하게 아직도 연락하는 친구여서 각별하기도 했다. 이렇게 오래된 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어깨가 으쓱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평소에는 누구보다 인연을 빨리 정리하는 나지만, 이번에는 쉽게 결정하기 어려웠다.


 모든 관계는 더는 상대를 이해할 수 없을 때 끝이 난다. 그리고 나는 친구를 이해할 수 없다.

 "넌 눈코입 따로 보면 이쁜데 조화가 잘 안 됐어.", "얘 앞에서 피부 얘기 하지마. 얘가 피부 제일 안 좋잖아ㅋㅋㅋ."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도, 쟤는 원래 말을 막 하는 애니까 괜찮다고 이해했다.

 내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1년 동안 대기업 취업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너는 젊은데 시간 아깝지도 않냐. 그냥 아무 중소기업이나 들어가서 빨리 일 시작해. 내가 너라면 그렇게 시간 안 버린다."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도, 얘는 전문대를 졸업해서 상황이 다르니까 그럴 수 있다고 넘어갔다.


 그런데 올해 들어서 내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나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친구의 인생이 남자친구로 가득 차 있었고, 친구의 연애사는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만나서 안부를 묻자마자 우리 오빠 오늘 여행 갔다? 라는 얘기를 시작으로, 서로 애칭은 어떻게 정하게 됐는지, 오빠랑 여행을 갔는데 어땠는지, 오빠랑 무슨 대화를 했는지 등 아주 사소한 얘기들을 집에 갈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내가 다른 얘기를 꺼내면, 그런 얘기 말고 남자친구 얘기나 해보라고, 본인은 연애 얘기가 제일 재밌다고 했다.

 나는 친구와 정서적인 교감을 하려고 만난 건데, 친구는 그저 본인 남자친구 얘기를 들어줄 사람을 만난 것 같았다. 예전부터 이런 면이 있었는데 점점 심해져서, 다른 얘기는 못 할 정도가 됐다.

 제일 실망했던 건, 내가 남자친구와 헤어졌다고 전화 걸어서 다시는 회피형인 남자를 못 만나겠다고 하니, 근데 우리 오빠도 회피형이다? 라며 갑자기 남자친구 얘기를 시작했을 때다.


 나는 친구와 건강한 관계를 맺고 싶다. 농담 따먹기도 많이 하지만, 가끔은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의견을 교환하고, 책 얘기를 하고, 고민은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갈 수 있는 담백한 친구를 만나고 싶다. 생각해보면 20살 이후에 만난 친구들은 다 이렇다.

 이 친구와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서 건강한 관계를 만들기에는 이미 늦은 것 같다. 서로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나는 크게 실망했기 때문에 되돌릴 자신이 없다.


 대체 정이 뭔지, 마음속으로는 다 결정했으면서도 며칠째 그 친구에게서 온 카톡을 읽지 못하고 있다. 차단하던가, 솔직하게 얘기하고 깔끔하게 정리하던가 어떤 행동이라도 해야 하는데 못하겠다. 상처받을 친구가 걱정된다. 그리고 괜히 친구와 같이 갔던 여행이 생각나면서 망설여진다. 그렇지만 다시 친구 사이로 지낼 자신도 없다.

 이런 내가 비겁하다. 분명히 너무 잘 지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분명히 글을 쓰면 생각이 정리될 줄 알았는데, 글을 마치는 이 순간에도 먹먹하고 슬프다.

작가의 이전글 29살의 내 집 마련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