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ella Apr 03. 2022

탯줄끊기

나와 너, 엄마와 나.


 나는 너를 갖고 필연적으로 내 엄마에 대한 생각을 한다. 나를 낳고 내가 전부가 되어버린 사람. 자신의 빛을 모두 내게 쐬어준 사람. 자신이 아닌 자식을 위해 살아온 사람.




 엄마는 늘 우리딸은 사춘기도 없다면서 기특해하곤 했다. 전업주부인 엄마에게 나의 귀가는 하루 일과 중 중요한 이벤트에 속했다. 택시기사, 과일장사, 작은 가방 공장에 용달차 운행까지 아빠는 안 해본 일이 없었고, 그리 넉넉하다 할 수 없었지만 우리는 행복했다. 엄마는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길 기다렸다가 같이 서점에 가거나, 책을 읽거나 읽어주거나 했다. 우리는 책으로 둘러싸여 산림욕 하기를 즐겼다. 어린애를 데리고 종로까지 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겠지만 나는 엄마 말을 잘듣는 순하고 똘똘한 어린이였고, 엄마는 초보지만 딸을 잘 다루는 현명한 여자였다. 우리는 집에 돌아오면서 매번 길거리에서 파는 떡볶이 세트를 사먹었다. 먼지를 뒤집어썼다며 아빠는 허락하지 않을 우리 둘만의 비밀이었다. 엄마는 그만큼 시적이고 예술가 같은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때 우리는 고대앞에 방 두개를 빌려 한쪽은 거주용으로, 한쪽은 가방공장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IMF는 전국민에게 고통스럽고, 가해자는 없이 피해자만 속출한 사건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집에 있는 금붙이를 팔아 국가의 빚을 나눠졌고, 우리도 그중 한 가정이었다. 국민성이 나라를 구하던 시절 아빠의 거래처이던 작은 학원들은 이 경제대란으로 줄줄이 대금을 주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우리 스스로는 구하지 못한 채 외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던 경기도로 이사를 가게되었다.

 일남오녀의 다섯번째 딸이었던 엄마의 어린시절은 부유했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외할아버지는 만화가로 성공한 사람이었고, 미술가로도 인정받아 그림 몇 점이 보물로도 지정된 이다. 옛날이라 대를 잇겠다는 의무감으로 막내아들까지 보기는 했지만 외할아버지에게 가장 사랑받았던 건 엄마였지 싶다. 엄마는 자기 아버지를 따라 친구들 모임에서 노래를 부르고 용돈을 두둑이 받기도하고, 외할아버지와 함께 영화를 보기도했다 한다. 대학을 다니던 때 외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아빠 같은 가난벵이와는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을거라고 한다. 최진사도 셋째딸도 아니지만 그만큼이나 귀한 대접을 받았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는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림 그리는 솜씨는 친탁을 해서 서울의 유명한 미술 전공 학교를 들어갈 수 있는 정도였고, 나중에는 무슨 아이스크림 포장 디자이너로 일도 했다고 한다. 목청이 좋고, 타고난 음성이 아름다워서 노래도 수준급이다. 비록 교회 성가대에서 활동한 게 전부이긴해도 알토 솔로를 놓쳐본 적은 없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나를 안타까워하고는 했다. 열가지 재주 가진 놈이 배고픈 법이라면서.

  

 작은 집 침대에서 생을 마감한 할머니를 보내며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가 아는 한 엄마와 외할머니는 그다지 애틋한 관계는 아니었다. 나에게 그분은 무척이나 보드랍고 말랑한 팔을 가진, 상냥하고 조용한 분이었지만 그분께 엄마는 여러 자녀 중 하나였지 싶다. 할머니는 항상 부군이 살아계실 때의 호화로운 삶에 멈춰있는 사람 같았고, 자꾸 현실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결국 그녀는 모든 걸 부정하는 쪽을 택해 치매로 삶을 마감했다. 고관절 부상으로 좁은 집이나마 똥을 칠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외국에 있는 형제들을 제외하고, 연락이 잘 닿지 않는 아들을 제외하고, 사정이 하나도 더 낫지 않던 형제들을 마저 제하고 남은, 가여운 우리엄마가 외할머니를 떠안게 되었을 때부터였나? 아니면 말년에 이혼 운운해야했던 폭군과 사별한 상실이 가져온 병과 함께 집으로 들어온 친할머니 때문이었을까? 내 부모님의 이혼에 가여운 양반들의 죽음을 탓하는 건 이제와서는 비겁한 일이다. 단지 긴 병에 효자 없다고 녹녹지 않은 사정에 아픈 양가 모친을 모셔야만하는 상황에서 부모님은 서로를 위로하는 법을 몰랐고, 나에게는 오랫동안 쌓아온 두 사람의 상처를 낫도록 도울 의지가 전혀 없었다. 내 일이라고 여기지 않았으므로.--수년 뒤 두분은 여러가지 이유로 다시 재결합하였습니다. 지금은 믿기 어려울만큼 너무나 사이좋게 잘 지내고 계십... 물론 부부 사이는 부부만 알겠죠-- 엄마는 이 부분을 가장 서운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두 사람 사이의 일을 내일로 여겨주지 않는 것. 이것이 자유의 시작이라고 여긴 것. 엄마는 단지 잡아줄 따뜻한 손이 필요했을지도, 어깨를 토닥여주는 몸짓이 필요했던건지도 모른다. 자식이 아니더라도 인간으로서. 이십년 가까이 지나서야 손톱만큼이나마 미안하고 가여운 생각이든다고 하면, 엄마는 '그럴거라고 했지'하며 싱긋 웃어보이고 말것이다.



 스무살. 나는 하고 싶은 것도 해보지 못한 것도 무척이나 많았다. 나와 엄마를 두고 주변 사람들은 탯줄이 덜 끊겨 그렇다고 했다. 집과 교회, 학교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던 소녀는 넓은 세상에 던져졌고 어른에게 배워야 할 대부분을 또래로부터 배웠다. 아르바이트를 두세개하며 늦은 귀가를 했다. 통금은 여덟시였다. 하지만 나에게는 너무하다 말할 자격이 없다. 한 번을 지켜지지 않았던 엄마와 나만의 자존심싸움 같은 거였다. 엄마는 전화를 했다. 나에게 수십통을 하고 내 친구들 번호를 알아내어 또 수십통을 했다. 걔는 제정신이 아니니 같이 어울리지 말라고 했다. 걔는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엄마와 다니던 서점 데이트를 위한 시간은 더이상 없다. 친구들과 소주 한 잔 하는게 최대의 즐거움이다. 수업보다 친구와 보내는 시간이 더 귀중하고 가치 있다고 믿었다. 이런 가치 있는 일에 대체 왜 허락을 구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엄마는 당연한거라고 했다. 학과 엠티에 참석해야 한다고 하면 학과장과 통화가 필요했다. 학과장은 그때마다 의아해했다. 엄마가 심한건지 내가 신뢰를 주지 못한건지 알 수 없다는 의미였을지도 모른다. 삼학년이 된뒤에는 친구들에게 엄마번호를 알려주고 차단하라고 한 뒤 나는 핸드폰을 꺼버렸다. 문자로 어디서 밤을 보낼건지 통보했다. 걱정할필요는, 고맙지만 사양하겠다는 의미였다. 

 보통의 중고생조차 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나는 덜 자란 상태로 성인이라는 꼬리표를 달았고, 그런 내가 엄마의 눈에는 다른 아이처럼 보였을 거다. 엄마는 나를 돌려놓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고, 나는 그런 엄마로부터 한 발자국이라도 멀어지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나의 이십대는 뒤늦은 사춘기 때문에 상처입었다. 그리고 엄마는 갈기갈기 찢겼다. 엄마와의 관계 개선을 핑계로 여러번 상담을 받았지만 뒤늦은 지금 돌이켜보면 아마도 면피하려고자 하는 간악한 행동이었지 싶다.

 나의 이십대는 방황의 연속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부모님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고, 나는 꿈도 미래도 없이 겉도는, 떡 한 점 내놓지 못하는 달토끼 신세였다. 이 신세를 탓하기 위해 한 짓이 일주일에 여덟번 약속을 잡는거였다. 같이 지내고 싶은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게 왜 나쁘냐고 우리는 우리대로 중요한 사정이 있는 것 아니겠냐고 따져물었지만 아마도 나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술값을 내 줄 이가 필요했던거고 나는 호구를 자처하고 나선 것에 지나지 않았는지 모른다. --지금 곁에 남아 있는 친구들은 그 꼴값을 함께 이겨내준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이 짓거리를 몇년 하고 나니 더이상 만나주는 사람도 없어 혼자 아파트 벤치에 앉아 맥주 한잔 들이키거나 조용하지도 않은 바에 앉아 괜히 분위기 있는 척 하곤 했다. 그리고 가까웠던 녀석이 떠나갔을 때 나는 엄마가 외국으로 봉사활동을 간 사이 뒤늦은 독립을 하겠다고 집을 나왔다. 이십대의 끝자락이었다.


 나와보니 큰 깨달음을 얻었다. 왜 나는 부모에게 일어난 일을 남일 삼지 말아야 하는가, 왜 잘난 척 다 자란 척한다는 엄마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가, 왜 집안의 룰을 따라야 하는가, 왜 나는 내 멋대로 살아선 곤란한가.

 나는 서른이 되도록 아무것도 혼자 해낸것이 없었다. 휴지, 치약, 샴푸, 얼음같이 시원한 물은 공짜가 아니었다. 식사는 두말하면 잔소리가 된다. 외국의 월세는 한국뺨을 치는 수준이었다. 어느하나 내 주머니에서 나가지 않는 것이 없다. 일주일에 다섯번 출근하지 않으면 의식주를 그저 해결해 주는 곳은 없다. 나는 무지한 이방인이었다. 다행히 남편을 만나 여러번 도움을 받고 결혼까지 해 타국에 발 붙이고 살고 있지만, 독립 초반의 나는 매일 밤 외로움이 더해지면 나를 기다려주는 내 나라 북반구로 돌아가야지 하고 되뇌곤 했다. 부모님 품이, 그 곁이 배부르고 등따숩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엄마는 언제 전화를 삼사십통씩했냐는듯 더이상 나를 닦달하지도 엇나갈까 불안해하지도 않는다.--물론 지금은 그러기엔 너무 제가 애엄마고 내일모레 마흔입...-- 어디냐고 물으면 친구들과 꽃시장에 간다하고 아빠와 산책을 나왔다한다. 내방은 옷방이 된지 오래다. 요리가 수준급인 엄마는 옷방에 세번째 김치냉장고를 들였다. 벽지에는 그림을 그리고 여전히 알토 솔로는 독차지한다고. 나를 낳고 삼십년이 훌쩍 넘어서고 나서야 우리는 헤어져있어도 각자 불행하지 않은채로 서로를 아끼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딸을 가지면서 아이와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고 생각하곤 한다. 태담의 대부분도 비슷했다. 하지만 언젠가 조금 상처받을 수도 있고, 아이를 자유롭게 놓아주어야 할때도 올거라는 걸 이제는 안다. 


 일방적으로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관계, 아이의 사랑을 갈구할 수 밖에 없는 존재적 위치, 아이와 나 사이에서 나는 을이 되었다. 잘못은 없지만 우선 사과부터 해야할것 같고,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최고를 주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나는 엄마다.

 





작가의 이전글 아기. 태어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