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부-코스모스
∙코스모스
⌜난 불가해한 우주가 고통을 축으로 돌고 있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분명 어딘가엔 순수한 기쁨에 의지해 세워진 기이하고 아름다운세상이 있을 것이다.⌟
-루이스 보건
8월 23일, 나는 1년 전 옐리야에 왔다.
나는 어디로 갈지 몰랐고, 의식 없이 끌려 다녔다. 그렇게 흥미롭고도 얄궂은 여정을 시작한 지 1년이 되었다. 비행을 하며 불어난 친구들과 이든, 샐리와 류를 포함한 동기들과 모여 입사 1주년 파티를 즐기기로 했다. 옐리야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역으로 손꼽히는 더 펄(The Pearl)에 줄지어 정박되어 있는 요트 중 하나에 올라타 파티를 연 것은 다사다난했던 1년을 기념하기에 탁월한 선택이었다.
“역시 우리는 ‘탑승’을 해야 기가 산다니까?”
샐리가 맥주 잔을 들며 활기차게 말했다.
“당연하지!”
카프레제를 볼 안 가득 담은 내가 샐리의 술잔에 나의 위스키 잔을 부딪히며 맞장구를 쳤다.
“한, 반가운 얼굴이 있을 거야. 네가 환영해 주면 좋겠어.”
이든이 갑작스레 나의 어깨를 잡더니 말했다.
이든 뒤엔 깔끔한 남색의 수트 차림을 한 라파엘이 주머니에 손을 꽂고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내가 이든과 라파엘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라파엘은 처음 그 모습처럼 거침 없이 나에게 다가와 가벼운 포옹으로 인사했다. 샐리와 류는 그와 나만의 시간을 만들어 주기 위해 자리를 피했고, 나는 어색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오랜만에 본 그의 금발 머리는 한층 짧아져 있었다. 구레나룻과 연결되어 있던 턱수염을 면도하여 전보다 어려 보였다.
“기대한 랑데부가 아닌 모양인데?”
“기대하진 못했지.”
내가 애써 차분한 어투로 말했다.
“눈빛은 여전히 매혹적이네, 한.”
라파엘은 지난 일들을 묻어둘 다짐이 선 듯 편안해 보였다.
“미안하다고 하지만 마. 제발.”
내가 입을 떼려는 순간 라파엘이 덧붙였다. 정확히 ‘그땐 미안했다’는 말을 하려던 참이었다. 나는 내가 또다시 경솔 해질 기회를 앗아간 라파엘 에게 감사했다.
“네가 그 말을 할 때 나는 가장 비참 해져.”
라파엘의 얼굴이 자신감을 살짝 잃은 것처럼 어두워졌다.
“머리 잘랐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내가 손을 뻗어 그의 짧아진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장난으로 대꾸했다.
“그렇다고 꼬시진 말고.”
그의 표정이 다시 짓궂게 밝아졌다.
“응.”
머리 위로는 폭죽이 터지고 있었다. 밤 하늘을 수놓는 오색찬란한 별빛들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밤 바다 위에 자리한 진주 도시는 눈부셨다. 이 곳을 동경하며 조종실에서 바라보던 때가 떠오른다. 옐리야는 여전히 생경하고 아름답다.
‘비행기 문 열면서 소리지르던 게 엊그제 같은데…….”
지금의 나는 그 때의 나로부터 얼마나 멀리 왔을까.
또 한 해가 지난 뒤의 나는 지금으로부터 얼마나 먼 곳을 항해하고 있을까.
이건 답을 위한 질문은 아니다.
나는 앞 일을 계획하고 대비하며 긴장하는 것을 이제 그만두기로 했다. 내내 그랬듯, 나의 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을 것이고, 그리하여 얄팍하게 마련해 둔 대비책들은 편견과 집착을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인생은 긴장하며 살기엔 너무도 짧다는 것이 지금의 내가 내린 결론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하찮은 여행자로서 나를 담고 있는 이 별과 그 안을 유유히 떠다니는 나라는 또다른 별의 시간과 공간을 아름답게 가꾸는, 그런 임무에만 충실할 것이다.
그것만 해도 나의 찰나는 순식간에 흘러버릴 것만 같다.
하늘을 보며 감상에 젖어있는 나의 손을 류가 잡아 끌었다.
“한, 저 쪽으로 가자. 이든이 작은 보트들을 불러왔는데 저걸 타면 더 멀리 갈 수 있대.”
나는 무거운 요트에서 가볍고 작은 배로 갈아타 분주한 도시의 야경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오직 밤하늘의 별빛에만 기댈 수 있는 곳을 향해 떠났다.
옐리야 시각 오후 11시.
이번 달에만 벌써 세 번째인 런던 행 스케줄을 위해 브리핑 룸에 앉아있다. 류는 요트 파티의 여파로 내가 런던 비행을 무사히 마치지 못할 것이라 단언했지만, 샴푸와 바디 워시를 사겠다는 일념 하에 비행을 강행했다. 잘한 일인지는 모르겠다. 방콕과 파리와 더불어 아라비아항공의 비행 편을 최다로 가지고 있는 런던은 까다로운 비행 중 하나이고, 그 까다로운 게 나의 스케줄엔 매 달 등장한다. 공항에 도착하기 전 확인한 크루 리스트에서는 한 명이 ‘펜딩(Pending)’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누군가가 전 날의 과음으로 급하게 병가를 결정한 것이다. 한 달에 네 번까지 가능한 병가는 브리핑 시간 기준으로 3시간 전까지만 신청을 하면 커리어에 문제가 없으며 마음대로 되지 않는 스케줄에 소소한 꾀를 부릴 수 있는 유일한 해방구이기도 하다. 물론 그로 인해 엉뚱한 크루 한 명이 불쌍하게 끌려 나와야 하겠지만, 나 또한 그것이 꼭 필요할 어느 날 그 꾀를 부려볼 작정이다.
‘그게 오늘이 됐어야 했나…?’
류의 말이 꽤나 영향력 있게 뇌리에 박힌 터라 이 비행이 내키진 않았다. 제발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도록 평화로운 비행이 되길 기도하며 스크린에 적힌 승객들의 정보를 노트에 받아 적고 있었다.
펜딩의 자리를 메꿀 크루 한 명을 제외하고 팀은 모두 브리핑 룸에 모였다.
“크루 한 명이 안 와서 브리핑 시작을 못 하네.”
검고 짧은 머리를 한 이집트인 사무장이 불만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아마 급하게 연락 받아서 그럴 거야, 조금 기다려 보자.”
부사무장이 인자한 웃음으로 그를 달랬다.
그때 문을 열고 크루 한 명이 들어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연락을 늦게 받아 서요.”
그 부드러운 목소리와 유려한 억양이 들려온 곳을 보니 다름 아닌 벤이 서 있었다. 나의 눈은 삽시간에 갈 곳을 잃고 허둥지둥 했다.
“응. 괜찮아. 이제 브리핑 시작해 볼까?”
부사무장이 너그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브리핑 룸에서 나의 시계만이 멈추었다.
만날 사람은 꼭 만나게 되는 것이 우주의 법칙이라고 엄마는 항상 말씀하셨다.
지극히도 평범한 날이었다.
나는 여느 때처럼 늦잠을 잤다. 류를 만나 집 앞의 브런치 가게에서 아침을 먹고 세탁소에 들러 유니폼을 찾았다. 집에 돌아와 유니폼에 향수를 뿌려 걸어두고, 슈트케이스에 작은 접이식 우산과 책 한 권을 챙긴 것을 확인 했고, 해리 스타일스의 노래를 들으며 비행을 준비했다. 21시에 픽업 차량에 늦지 않게 올라 타 비행 정보와 기종에 대한 숙지를 마쳤다.
지극히도 일상적이었다.
그런데 방금 문을 열고 들어온 한 사람이 그 하루를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나는 숨이 차오르고 콧물을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의 시야가 잘 닿지 않는 곳에 그가 앉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이.. 한? 난 네 이름을 알지만 다른 크루들은 모르니까 네 소개를 좀 해 줄래?”
사무장이 나의 멈춘 시계를 깨웠다. 그 사이에 다른 크루들은 모두 자기 소개를 마친 것이었다. 나는 벤의 소개를 듣지도 못했다.
“아, 한국에서 온 한. 1년 차야.”
나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 14명의 크루와 벤을 향해 내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껏 가장 짧은 대사 였을 것이다. 이 짧은 문장 하나를 내뱉는 데에도 나의 호흡은 흐트러졌다.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춰도 벤이라면 속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이 나를 더욱 궁지로 몰고 있었다. 다행히도 벤은 나의 존재를 인지 하지도 못한 듯 내 쪽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우주의 법칙은 갈수록 영악해졌다. 사무장은 나에게 R3A 포지션을 주었다. R3인 벤의 옆 자리이자 그를 도와야 하는 포지션 이었다.
정말 너무하네.
내가 존경하는 아인슈타인은 말했다고 한다. 우리의 인생은 다만 우리가 죽는 순간에 회상하는 기억의 일부분일 뿐이라고. 그 말을 비행기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내내 되새겼다. 벤의 옆자리에 앉아 긴 이륙과 착륙 시간 동안, 그리고 그와 같은 카트를 끌며 해야 할 세 번의 서비스 동안 ‘태연’이라는 완전한 가식을 떨려면 아인슈타인의 그 말을 머리 속에 각인시키고 그러니 두려워할 것도, 안달 낼 것도 없다고 나를 세뇌시키는 것에 성공해야만 한다. 기내에 탑승한 후에는 여느 때 보다도 안전 체크에 몰두했다. 좌석의 시트를 일일이 떼어내어 테러 물질의 유무를 확인하고 유아용 구명조끼와 성인용 구명 조끼의 유효기간 또한 일일이 확인했다. 나의 고개는 깁스라도 한 듯 벤 쪽으로는 돌려지지 않았으며 나는 그와 한 공간에 머물지 않으려고 애썼다. 상상 속에서 멋지게 건네던 미안하단 말과 고맙단 말은 현실에선 불가능한 것이었다. 나는 유치하고 촌스럽게 굴었다. 벤 또한 묵묵히 제 할 일만 했고, 몰래 살핀 그의 안색은 편치 않아 보였다.
숨막히는 이륙이었다.
벤과 나는 한 뼘 정도의 틈을 두고 나란히 앉아 비행기가 성층권 하부에 안착할 때까지 숨 소리도 내지 않았다. 서로의 떨리는 파동만은 고스란히 느낄 수가 있었다. 벤은 긴장하거나 떨릴 때 집게 손가락으로 아랫입술을 훑는 버릇이 있는데 비행을 시작한 뒤로 그의 손가락은 입술에서 떠나지 않았다. 불편한 마음으로 서비스는 시작되었다.
“저녁 식사는 괜찮으셨어요?”
나는 긴장감을 승객과의 수다로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좀처럼 기내에서 승객과 잡담을 나누는 것을 즐기지 않는 나이지만 벤이라는 존재가 가져온 이 무거운 긴장을 털어보려면 쓸데없고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이 필요했다.
“네. 잘 먹었어요. 아라비아항공의 기내식은 언제 먹어도 훌륭하네요.”
“네. 감사합니다. 레드 와인 좀 더 드릴까요?”
“그럼 좋죠. 블러디 메리도 가능 하죠?”
언제나 하나를 물어보면 두 가지를 요구하는 승객들 덕에 비행을 바쁘게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승객들 과의 대화로도 마음을 진정하지 못한 나는 블러디 메리를 제조하다가 토마토 주스를 갤리 바닥에 쏟는 등 바보같은 실수까지 남발하기 시작했다.
“캐빈 크루, 난기류에 대비하여 착석 하도록.”
허둥대며 토마토 주스를 닦고 있는데 캡틴의 갑작스런 지시가 기내에 울려 퍼졌다. 벤과 나는 신속하게 갤리와 승객의 안전 상태를 확인한 후 점프 시트에 앉아 안전 벨트를 맸다.
예상치 못한 난기류였다.
이번 비행은 내내 예상치 못한 일들로 어지러울 것 같다.
난기류는 생각보다 오래 갔고, 그 강도 또한 심했다. 일반적으로 구름과 충돌하며 지나갈 때에 감지되는 충격과는 확연히 다른 종류였다. 창 밖을 보니 비행기가 한 자리를 맴도는 것처럼 보였다. 뭔가 이상했다.
나와 마주보는 자리의 아기는 너무 놀라 울지도 못하고 있었다. 승객들 또한 출렁이는 비행기 때문에 겁에 질려 안전벨트를 손에 꽉 쥐고 있었다.
“난기류가 멈출 때까지 서비스는 중단하는 거야.”
사무장이 인터폰으로 캡틴의 지시를 재차 전달하였다.
벤과 나는 하늘 위에 갇히고 난기류에 갇혔다. 그와 나 사이엔 일년 전과는 달리 무거운 침묵이 자리했고 둘 중 누구도 그 침묵을 깰 의지가 없었다.
잠시 후 사무장의 인터폰이 다시 울렸고, 벤이 받았다.
“아… 네. 알겠습니다.”
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그의 불안한 목소리에 나까지 겁을 먹었다.
“수니아랑 바룬 사이에 급진적인 군사력 과시가 발생 했대. 여객기가 있다는 걸 그 쪽에 보고 했고 우리는 다른 항로를 이용하려고 수신을 기다리는 중이라니까 너무 걱정 하진 않아도 된대. 근데 착륙 시간이 좀 늦어질 거래.”
벤이 기계처럼 딱딱하게 본인이 보고 받은 사실만 나에게 전했다. 그는 이 상황을 승객들이 듣고 공황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최대한 목소리를 죽이며 말했다. 그가 다소 긴장하여 단어의 마디 마디를 눌러 말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으…응.”
내 마음 속에서도 전쟁. 밖에서도 전쟁. 그런데 정말 이대로 여객기 사고라도 일어나면 어떡하지..? 나는 불안한 마음을 벤에게 털어놓고 싶었지만 이제와 그에게 그런 친근함을 바라는 것은 염치 없는 일이었다. 어느새 나는 마음 속으로 간절히 신을 찾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비상 벨이 켜지더니 기체가 급강하를 했다. 벤이 습관처럼 그의 긴 팔로 나의 허벅지를 감쌌다. 나의 몸이 뜨지 않도록 한 것이었다. 그의 손길이 아직도 너무나 따뜻하고 익숙한 것이 더욱 당황스러웠다.
벤은 자신의 반사 신경에 대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재빨리 손을 거뒀다. 나는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못한 채 애꿎은 입술만 깨물었다. 기내 곳곳에서 짧은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이 상황을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 쯤으로 생각하는지 신이 난 표정으로 양 손을 활짝 들어 보이는 젊은 남자 승객 무리도 있었다.
나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여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매뉴얼을 복기했다. 천만 다행으로 난기류는 십분 정도 지속되다가 멈추었다. 항로 변경을 마친 비행기는 다시 안전한 하늘 길에 안착했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대로 미사일을 맞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벤에게 하고 싶은 말도 끝내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줄 알았어…….’
“승객 여러분, 캡틴 크리스토퍼 입니다. 항로 변경으로 인해 착륙 시간이 두 시간 늦춰진 점 고지해 드립니다. 비행기의 안전에는 이상이 없으니 크루들은 서비스를 재개해도 좋습니다. 비행에 불편을 드리게 되어 다시 한번 죄송하고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경쾌한 크리스토퍼의 목소리가 기내에 울렸다. 서비스를 재개하자 승객들은 참아왔던 질문을 쏟아내었다. 나는 단순한 난기류였다며 승객들을 안심시켰다. 완벽한 미소로 그들을 안심시켰지만 유니폼 안의 다리는 아직 후들거리고 있었다. 이 떨림이 보이지 않도록 두껍고 펑퍼짐하게 제작된 유니폼이 새삼 고마웠다.
길었던 8시간이 지나 유달리 길었던 비행을 마무리하는 중이었다. R3구역은 여전히 적막했다. 나는 이 침묵을 깰 작정이었다. 전쟁터에서 기적적으로 벗어났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 속에 아주 작은 조각의 후회도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훌륭한 핑계 거리를 얻은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우리의 생존이 보장된 뒤로 줄곧 어떤 말로 그에게 말을 걸어야 할까에 대한 생각 때문에 무척이나 골치가 아팠다.
오늘 따라 그리웠던 런던의 흐린 구름 위를 맴돌며 모든 승무원들은 착륙을 기다리는 점프 시트에 앉았다. 나도 벤의 옆에 앉았다. 주먹을 꽉 쥐고 내 안의 존재할 수 있는 온갖 기운을 끌어 모아 목소리를 내었다.
“할머니는 잘 지내셔?”
몇 시간 동안 고민을 해도 말을 고르지 못한 나였다. 간신히 뗀 입에서 오지랖 넓게도 이 말이 튀어나온 것은 참 별 꼴이었다. 그런데 벤의 눈이 삽시간에 침울해졌다.
“돌아가셨어. 육 개월 전에.”
그가 호흡을 짧게 멈추더니 손가락으로 입술을 매만지고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갑작스런 그의 대답에 심장이 먹먹해지고 손이 파르르 떨려 급하게 깍지를 끼었다. 흔들리는 그의 눈빛을 보는 것도 그랬지만 남몰래 그리워하던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니 누가 나의 심장을 쥐어 짜는 것처럼 조여왔다. 육 개월 전이라면 그와 나의 세계가 단절 되었던 시기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시드니 비행을 갔을 때 인지도 모른다… 누구보다 가족을 사랑하는 그가 외롭고 고통스러웠을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지고 내가 꿈이라고 믿어왔던 그 날 밤의 슬프고도 원망스러웠던 눈이 떠오른다. 나는 이내 감정이 격해져 눈물이 흘렀다. 벤이 보지 못하도록 고개를 돌리고 주책스런 눈물을 닦았다. 다행히도 기내의 조명이 어둡게 설정되어 그 안에 숨을 수 있었다.
“미안해.”
벤은 나의 사과를 받아주지 않았고 그 공허한 민트 색 시선을 나에게로 다시 옮기지도 않았다. 조각처럼 온기가 사라진 그의 얼굴을 보니, 내가 마지막으로 그에게 건넨 대사가 기억이 났다.
내가 그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은 이기적인 일이었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창백해진 얼굴을 하고 첫 번째로 방의 키를 얻어 벤을 포함한 모든 크루들을 뒤로한 채 올라왔다. 비틀거리며 방에 들어와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사무치는 감정이 뼈마디를 파고든다. 나는 후회를 하거나 그 때의 나로 다시 돌아가서 다른 선택을 하길 바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 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다시 어리석고 잔인해질 수밖에 없을 테고, 가련한 두 영혼은 또다시 상실의 고통을 겪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 무자비한 고통과 고뇌의 시간들은 내가 스스로와 다시 연결되기 위한 필수적 요소였다는 것을 알아 버린 지금의 나는, 그저 나에게 가장 소중했던 존재가 가장 틀린 시기에 날 찾아왔다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수밖에 없었다.
‘너무 불공평 하잖아….’
이 잔인한 운명을 하릴없이 따를 수밖에 없는 나는 그가 된 것처럼 아프다.
그가 느꼈을 억울함과 답답함, 슬픔이 나의 체면 손상이나 두려움보다 훨씬 더 무겁고 심각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울다가 베갯잇이 축축 해질 때쯤 돌연 초인종이 울렸다.
‘룸 서비스 안 시켰는데….’
나의 몸은 물을 먹은 솜처럼 무거워져서 침대에서 일어나기도 소리를 내기도 싫었다. 시체가 바다 속에 가라 앉듯이 나는 침대 속으로 가라 앉았다. 하지만 문 밖에 있는 게 누군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초인종을 눌러 나를 괴롭혔다.
“귀찮게 하네, 정말!”
나는 현관에 있는 거울을 보고 번진 마스카라를 대충 닦아내고는 벌컥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내 앞에 벤이 서 있었다.
눈동자엔 변함 없이 에메랄드 빛 바다를 담았고, 숲 내음이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뭐가 미안한데?”
그가 문 밖에서 물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민트 색 눈동자와 다시 마주한 순간부터 머리가 하얘졌을 뿐더러 입을 열면 속절없이 눈물이 터져 나와 나의 복잡한 마음을 전하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저 노란 형광등 불빛이 날 비추는 호텔 복도에서 울지 않기 위해 눈에 바짝 힘을 주었다.
“아직도 내가 널 모르고 살길 바래…?”
벤이 불안한 듯 말 끝을 흐리며 질문을 바꿨다.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의 오해는 만들고 싶지 않았다.
“왜 왔어?”
때마다 이상한 말을 하는 나의 입은 도무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그때 벤이 나의 말을 잘랐다.
“밖에 말이야, 코스모스가 피어 있더라. 내가 십 년 동안 런던에서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한 광경이거든. 그래서… 너랑 산책이나 하러 갈까 하고. 싫지 않으면 그냥 고개 끄덕이기만 해줘. 말 안해도 되. 네가 싫지 않은 것만으로… 충분해.”
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는 곧장 방으로 들어와 화장을 고치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벤이 기다리는 로비로 나갔다. 일층까지 오는 데 일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벤은 일 년 전의 코르니쉬 공원에서처럼 헐렁한 옷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있었지만, 나에게 반갑게 손을 흔들어 보이진 않았다. 그가 충분히 용기를 내는 중인 것은 알 수 있었다.
여전히 우리 사이엔 무거운 침묵이 흘렀고, 서로에게 받은 상처가 마음 깊이 박혀 있었고, 그 상처를 언젠가는 마주하고 꺼내 보여야만 했다.
그 모든 것을 덮어두고 벤과 함께 밖으로 나가 바라본 런던 하늘은 보라색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선명한 파란색 이었고 비 온 뒤 땅의 냄새와 공기가 청량하게 코 끝을 상쾌하게 해주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그와 내가 맞춰가는 발걸음을 구경했다.
벤의 말대로 우리가 걷는 길의 시멘트 바닥의 틈 사이에는 코스모스가 듬성듬성 피어 있었다. 나는 그 코스모스가 어디에서 왔고, 지금은 어디에 있으며, 또 앞으로는 어디로 갈 지 궁금했다. 이 황량한 시멘트 바닥에 어찌된 연유로 자리를 잡게 된 건지 이해할 수도 없었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코스모스는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을 보니 나는 안심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