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망샘 Jun 29. 2020

비도 오고 그래서

여행이 바꾼 나 1탄

세계여행 종료 D+100

이 여행이 가져온 변화를 헤아려 보자면 글쎄, 잘 모르겠다. 퇴사를 하고 오백 일 넘게 여행을 했는데도 나는 여전히 그대로인 것 같았다. 그런데 지난주부터 시작된 장마를 겪으며 비로소 알게 됐다. 이 여행은 꽤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비록 사소할지라도 소중한.

1번. 비


예전의 나는 비 오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습기로 가득한 축축한 공기에 빗물이 발과 다리에 튈 때마다 얼굴을 찌푸렸다. 특히 쪼리를 신고 비 내리는 거리를 걸은 후 다리 뒷 면을 봤을 때의 처참함이란... 장마가 시작되는 요즘 같은 날은 기분이 내내 처졌다. 그중에서도 출근하는 평일 아침에 내리는 비가 최악이었다. 가뜩이나 6시 30분 전에 타야 덜 막히는 강변북로는 비가 오면 속수무책으로 막혔다. 그게 싫어 지하철을 타면 사람들 우산이 다리에 닿아 빗물을 피할 길이 없었다.
  
여행을 하면서도 수없이 많은 비를 만났다. 출근해야 할 곳이 없으니 비 오는 날엔 숙소에 콕 박혀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의무 없는 자유는 그토록 싫어하던 비 내리는 날 극대화됐다. 뽀송뽀송한 상태로 방 안에서 듣는 빗소리는 최고의 ASMR이었다. 흙냄새를 가득 품은 싱싱한 비 냄새와 비가 그치고 난 후의 청량한 공기는 디퓨저로 소장하고 싶을 정도였다.

장기 여행이었지만 늘 봐야 할 것, 가야 할 곳, 먹어야 할 것들로 넘쳐나는 여행 정보의 홍수 속에 마음이 바빴다. ‘이탈리아 여행’을 검색하면 아침부터 밤까지 시간을 쪼개 부지런히 여행한 정보가 넘쳐나는데 해가 쨍쨍한 날 숙소에서 쉬는 것은 죄책감이 들었다. 그 와중에 내리는 비는 불청객이 아닌 반가운 손님이었다. 비를 핑계로 관광을 하지 않을 때 비로소 여행하며 쉬는 느낌이 들었다. 비 오는 날 이탈리아 토스카나 숙소 모닥불 앞에 앉아 하루 종일 책을 읽었던 날은 손꼽히게 행복했던 순간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비가 좋아진 건 순전히 여행 중이었기에 가능한 줄 알았다. 여행이 끝난 한국에서는 다시 비 소식에 몸서리치겠지. 그런데 장마가 시작된 지난주 내내 나는 기분이 좋았다. 내리는 비와 함께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던 기분이 이상하게 반대로 상승했다. 때 이른 더위에 뚝 떨어진 의욕이 다시 생겨났다. 그동안 나는 비에 누명을 씌웠다. ‘비’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비 오는 날 해야 하는 출퇴근’을 싫어했던 것이었다. 비 오는 날 출근하지 않는 생활을 지켜내려면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야겠다. 비는 소중한 기호를 의욕적으로 지켜내야겠다고 다짐하게 한다.  

-비예보를 보고 기분 좋은 돌아온 이번 주 월요일에 씀-



매거진의 이전글 세계여행으로 잃은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