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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샘 Jul 02. 2020

관종력이 한껏 상승한 지하철을 타는 아재

여행이 바꾼 나, 2편

(1편에 이어서)


두 번째, 지하철


지하철보다는 버스가 좋았다. 정시에 도착하고 교통체증에 갇힐 염려가 없는 지하철의 장점을 이기는 건 실내 운행의 답답함이었다. 보통은 어두컴컴한 지하만을 지나기에 잠시 졸거나 스마트폰을 하다 보면 내릴 역을 지나치기 일쑤였다. 대학생일 때 졸다가 한강을 건너기 전에 가까스로 내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물론 전망 좋은 당산-합정 구간 같은 곳도 있다. 한강과 여의도가 사진처럼 멋있게 지나가는 경로는 10퍼센트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여행을 다녀온 이후 나는 버스보다 지하철을 골라 탄다. 버스보다 덜 밀폐돼 요즘 시국에 조금 안심하고 탈 수 있다. 사실 저렴한 이유가 일 순위다. 일산에서 버스로 서울을 다녀오려면 광역 버스를 타야 한다. 그런데 지하철로 강남까지 단돈 1650원이면 갈 것을 버스로는 2800원, 간혹 환승하면 100, 200원까지 더 붙기도 한다. 수입이 크지 않은 때는 아끼는 게 돈 버는 것이기에 웬만해서는 지하철을 탄다.

그러고 보니 세계여행을 먼저 다녀온 부부가 해줬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분들 역시 귀국 직후 돈을 아끼고자 홍대역에서 내릴 걸 한 정거장 전인 합정 역에서 내려걸었다고 했다. 홍대-합정 구간을 지나면 100원이 추가되는데 그게 아까우셨다고. 퇴사한 지 얼마 안돼 통장이 두둑했던 때 이 얘기를 들었을 때는 큰 감흥이 없었다. ‘와 그렇게까지...?’ 속으로 생각하고 말았는데 지금은 격하게 공감한다.
게다가 세계를 돌아보니 한국만큼 지하철 요금이 저렴한 곳도 없다. 뉴욕은 한 번에 $2.75(약 3천 원)였고 홍콩과 런던 역시 교통권을 사도 가격이 부담스러웠다. 한국은 카페와 휴대폰 요금이 비싼 대신 지하철 요금은 정말이지 저렴하다. 게다가 환승까지 여러 번 되니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여행을 하며 1억을 썼지만 매일 돈, 돈, 돈 거릴 수밖에 없다. 먹고 자고 마시는 모든 것이 돈이니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는 게 여행이었다. 우선순위에 맞게 예산을 관리하며 쓸 데 쓰고 아낄 건 아끼는 습관이 어느새 몸에 배어버린 것이다. 시간이 남아도는데 직행 버스를 천 원 더 주고 타는 대신 환승은 한 번 더 하더라도 지하철을 타는 게 너무 맞아서 도저히 버스를 타기가 아깝다. 버스 안에선 멀미가 나서 창밖을 보거나 자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는 반면 지하철에선 와이파이도 되고 책도 멀미 없이 읽을 수 있는 여가 포인트는 덤이다. 환승하며 계단을 걸으면 하체 운동도 되는 장점도 있다. 특히 요즘 같은 시국에 버스를 탔는데 안에서 기침을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너무 싫다. 지하철 만세!




작년 9월 뉴욕





세 번째, 성격



요즘 유행하는 MBTI를 인터넷으로 다시 해봤다. 회사에서는 한 권 분량으로 했던 것 같은데 인터넷에 있는 문항은 꽤 단순하다. 그래서일까? 내가 기억하는 성격과 영 다른 유형이 나왔다. ‘자유로운 영혼의 연예인’이라니... ‘놀면 뭐하니’에서 비가 해당된다고 나온 그 유형이 왜 나에게 나오지......
세계여행을 하며 관종력이 한껏 올라와서일까? 관종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결과까지 나오니 참 재밌다.

관종력과 별개로 지인들과 대화할 때 가끔 낯선 내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긴 했다. 예전 같았으면 할까 말까 고민하다 않았을 텐데 지금은 그냥 내뱉는다. 어차피 한 번뿐인 여행이니까 마음 가는 대로 흘러가게 두었더니 그렇게 성격이 바뀐 걸까?


출처: 네이버 이미지



마지막, 식성



여행을 떠나기 전 나는 밀가루 중독자였다. 출근의 유일한 낙이었던 점심시간엔 샌드위치 같은 빵 쪼가리나 파스타, 피자가 먹고 싶었다. 매 끼니 파스타를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그런 내가 아재들과 순댓국, 동태탕, 북엇국 집을 전전했으니 입이 삐쭉 튀어나올 수밖에. 기회만 되면 팀 점심을 벗어나 친구들과 점심 약속을 잡는데 혈안이 됐었다. 그 날 점심메뉴에 따라 기분이 좌우된다니 너무 유치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전, 오후를 함께 하는데 점심 한 시간마저 내 의지와 상관없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건 참을 수 없었다.

퇴사하고 여행을 하면서는 그 좋아하던 밀가루를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런데 역시 질릴 때까지 해보니 물렸다. 반 년가량 지나니 밥과 국이 먹고 싶어 졌지만 쉽게 접할 수 없었다. 한인마트가 없는 지역에 가게 되면 밀가루 말고는 선택할 수 있는 메뉴가 없었다. 도통 입에 맞지 않는 미얀마, 코스타리카, 보스니아 등지의 현지식보다 안전하고 실패할 확률이 낮은 파스타, 샌드위치가 나았다. 아침은 거의 대부분 시리얼 혹은 빵이었고 이동하는 날은 하루 한 끼를 샌드위치로 때운 적도 많았다.

새로운 도시에 가면 가장 먼저 했던 것은 지도에서 한인 마트와 한식당 검색이었다. 여행 가며 김치와 라면을 싸가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내가 이렇게 되다니! 장기 여행은 밀가루 중독자도 뼛속까지 한식 마니아로 만들어버렸다. 한식을 구하기 힘들다면 라면을 잔뜩 쟁였다가 먹었다. (놀랍도록 라면의 침투력은 엄청나다. 멕시코에는 한국에서 보기 힘든 오뚜기 라면도 종류별로 있으며, 심지어 과테말라 역시 라면을 구하기 쉬웠다) 평생 먹을 라면과 샌드위치를 일 년 동안 다 먹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맛있는 파스타, 샌드위치라 한들 백 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물린다. 그토록 싫어했던 순댓국이 파스타보다 좋다. 나이가 들수록 그때의 아저씨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김밥, 컵밥, 삼각김밥, 밥버거 등 밥 천국인 한국이 천국 같다. 세계여행을 다녀보니 이민이 가고 싶은지, 살고 싶은 나라가 있는지 자주 질문을 받았다. 그때마다 나의 대답은 한결같이 ‘No’. 아무리 좋은 나라에 가도 한국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한국을 떠날 수 없게 식성이 바뀌어버렸다. 아, 순댓국 먹고 싶다.




역시 사진은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참이슬 광고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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