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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샘 Oct 21. 2020

다시 일을 하게 되기까지

어쩌면 여행 덕분에  이어진 길

퇴사하고 세계여행 종료 D+216

한국에 돌아온 지 반 년이 지나 정식으로 일을 하게 됐다. 당장 생활비가 없어 재취업한 건 아니고 예전같은 월급을 받으며 주 40시간을 일하는 정규직이 된 것도 아니다. 덕업 일치를 할 수 있는 아이템(요가와 마케팅)으로 사업을 준비하고 있는 스타트업의 초기 멤버가 됐다. 굉장히 초기 단계라 명함은 커녕 사이트도 없다. 거의 무보수로 일하고 있지만 처음으로 ‘하고 싶은 일’을 고른 기분이다. ‘내가 이 시간을 들였는데 이것밖에 못 벌어?’라는 생각이 아예 들지 않을만큼 (아직까지는) 재미있다. 배울 점 많은 팀원들과 함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기획하고 다지는 시간이 유의미하게 느껴진다. 퇴사를 하기 전과 긴 여행을 하면서 내가 다시 일을 할 수 있을까, 걱정한 것과 반대로 인생은 흘러가는 게 좋다.

이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달력을 14년 전으로 돌려야 한다. 고2 말쯤 되니 슬슬 내 성적으로 갈 수 있는 대학교가 그려졌다. 수학 공부를 매일 울면서 했지만 안 되는 건 안됐다. 모의고사 성적을 보아하니 수능으로는 승산이 없어 보였다. 그나마 내신 성적은 좋은 편이었고 수학보다 외국어 공부하는 걸 즐겼으니 수시 ‘글로벌’ 인재 전형으로 방향을 틀었다.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으나 나 때는 이곳저곳에 ‘글로벌’을 붙이는 게 유행이었다. 친구들이 수능 공부를 할 동안 토플과 미국 고등학생들이 보는 경제학 시험 따위를 공부했다. 고3 5월에 스페인어 능력 시험을 보고 있었으니 말 다했다. 여기서 떨어지면 수시도 수능도 모두 망치고 인생도 망하는 줄 알았다. 절박했던 만큼 소위 말하는 스펙이라는 것에 매일 좌절했다. 화려한 대외활동과 수상이력이 어느 외곽지역에 있는 고등학생에게 있을 리 없었다. 어렸을 때 외국물 먹고 온 애들이 그제야 부러워졌다. 그래도 마른걸레 물을 짜듯 짜내고 짜내어(부모님 등골도 2개 정도 빼먹었다) 결국 원하는 학교는 아니었지만 글로벌 전형으로 입학하게 됐다.

내가 대학생만 돼봐라. 스펙 준비 잘해서 취업할 때는 이 수모와 수고를 겪지 않아야지. 절치부심하며 들어간 대학교에서 참 많이도 빨빨거리며 돌아다녔다. 그러다 13년 후 나에게 함께 창업 초기 멤버를 제안한 귀인도 만났다. 외국계 의류 회사의 대학생 마케팅 프로그램을 만든 그녀는 당시에도 차장님이었다. 토요일 저녁 7시부터 시작하는 힘들기로 유명한 커리큘럼인 대외활동이었다. 활동비로 청바지 몇 벌을 받은 게 전부지만 이 활동을 하는 내내 나는 뭔가 된 양 굴었다. 이걸 해내면 차장님처럼 멋진 커리어 우먼이 될 것 같았다. 촌티 나던 스무 살 대학생은 학교 수업보다 많던 과제를 하며 학점과 맞바꿨다. 그리고 4년 후 졸업반이 되어 취업 준비에 한창일 때, 학교에서 주최한 모의 면접에서 우리는 다시 만났다. 그때는 아마 더 높은 직급이셨을 테다. 역시 토요일 저녁이라는 이상한 시간이었는데 일을 하는 그녀를 존경해 마지않았다. 그렇게 아득바득 쌓은 스펙과 모의 면접 실력으로 원하는 회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문득 그녀 생각을 했다. 자발적으로 토요일 저녁 7시에 프로그램을 만들어 일을 했던 그녀를. 나였다면 어떻게든 평일 일과 시간에 욱여넣었을 텐데, 이래서 그녀와 나의 커리어 차이가 나는 거구나. 나에겐 자괴감을 주며 동시에 경외감이 드는 인물이었다.


[어쩌면 여행 덕분에]


퇴사하고 여행을 떠나기 전 시간을 내어 집 앞까지 와준 그녀는 요즘 제일 잘 나가는 회사의 임원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2년이 지나 여행에서 돌아와 다시 만났다. 전 회사가 있던 여의도에서 회사원들 점심시간이 끝난 한시 반에 만나 늦은 브런치를 먹으며 안부를 물었다. 회사를 다니며 대학원도 병행한 그녀는 학교 과제로 생각한 사업 아이디어로 이미 정부의 지원금까지 받은 상태라 했다. 마음속 깊숙한 곳부터 존경심이 둥둥 떠오르며 이야기를 재밌게 듣고 있었다. 평소 관심을 갖고 있는 홈 피트니스 사업이길래 요가를 하며 여행하며 본 것부터 알고 있는 피트니스 쪽 이야기를 신나게 했다. 그러다 별안간 무언가 훅 들어왔다.

“사실 이 사업의 콘텐츠 기획일을 네가 도와줬으면 좋겠어. 우선 몇 달간은 프리랜서로 자문을 해주고 일해 보면서 괜찮다 싶으면 창업 초기 멤버로 들어오는 게 어때?”
“네, 저...저요? 제가요?”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알고 지낸 지 10년이 지났지만 사석에서 만난 건 세네 번이 전부였던 내게는 하늘같이 높아 보였던 분의 제안이었다. 커리어우먼의 정점을 달리고 있는 분이 새롭게 만들고 있는 서비스를 함께 하는 거였다. 한국에 돌아와 감사하게도 여러 일을 제안받았지만 모두 마음이 동하지 않아 거절했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토록 원하던 덕업 일치를 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우선 집으로 돌아와 내가 잘할 수 있는지 일도 해보며 고민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한 달 후 이 동아줄을 잡기로 결정했다.





긴 여행을 다녀오지 않았다면 오지 않았거나 잡지 않았을 기회일지도 모르겠다. 인생을 단순하게 살다 보니 고민하는 시간도 짧아졌다. 중요한 건 결정보다도 그 결정을 최선이 되도록 노력하는 거니까. 고민할 시간에 하나라도 하면 뭐라도 배우고 발전할 테니까. 여행을 하며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환경에서 신나게 일할 수 있는지 생각하는 시간이 없었다면 자칫 위험해 보이는 일에 나의 시간을 걸지 않았을 거다. 지오디(god) 오빠들이 <길>에서 열창한 것처럼 무엇이 내게 기쁨을 주는지, 돈, 명예 아니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인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해보지 않았다면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많은 스타트업이 그렇듯 실패하면 어떡하지, 서비스를 내보였는데 망하면 어떡하지, 내가 들이는 노력과 시간에 비해 돈을 못 벌면 어떡하냐고! 이런저런 위험이 도사리지만 크게 위협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나에겐 그럴듯한 회사의 간판보다, 명함에 적힌 직함, 명예보다 어디에 살아도 먹고살 수 있는 실력을 키우는 게 더 좋다. 일 이야기로도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떠든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안정적으로 예상 가능한 월급을 받으면 안정성과 평생 큰돈을 벌 가능성이 반비례함을 안다. 진절머리 치며 퇴사를 한 이유는 일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주 5일이나 의무적으로 묶여있어야 하는 시공간의 제약이었음을 안다. 일에서 재미를 못 느낀 주된 이유는 성장하는 기분을 못 느껴서였다. 그러나 이분과 함께 일하면 스무 살 때로 돌아가 열정적으로 재미를 느끼며 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나는 아직 삼십 대 초반이라 잃을 게 별로 없다. 무엇보다 이 일을 고사하고 하고 싶은 뚜렷한 일도 없던 참이다.


그래서 스타트업 돛단배에 올라타기로 했다. 돛단배가 요트가 될지, 유람선이 될지, 로켓이 되어 우주로 날아갈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이게 정말 나의 길 인지, 이 길의 끝에서 내 꿈이 이뤄질지, 그 꿈은 누굴 위한 꿈인지, 그리고 그 꿈을 이루면 난 웃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 길 위에서 어떤 여행을 하게 될지 기대된다. 그걸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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