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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샘 Oct 28. 2020

제주, 나의 F5 새로고침 키

의지와 우연이 뒤섞여 우리를 재미있는 곳으로 데려가고 있다.  

퇴사하고 세계여행 D+223



여행을 마치고 두 달 반 가량 지났을 즈음 급작스럽게 제주 여행을 다녀왔다. 한국에 돌아와서 가장 슬럼프에 빠져있던 날이었다. 백수로 맞이하는 월요일은 대개 행복도가 극에 달했으나 그 날은 월요일인데도 즐겁지 않았다. 때 이른 더위에 축축 쳐졌고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해야 할 일이 있었지만 이걸 한다고 성과가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안 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티가 나지 않는 일이었다. 매일 온라인 상점에 제품을 올린다고 매출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새로고침을 눌러봐도 신규 주문은 0이었다. 그렇게 쳐져있다 기분 전환 삼아 오랜만에 동네 카페에 가서 좋아하던 아이스 라테를 주문하는 사치를 감행했다. 그때 친구를 만나러 서울에 나간 남편에게 급하게 전화가 왔다.

“오늘 제주도 갈래?”

그가 전화한 시간은 오후 4시. 사연은 이랬다. 우리가 남미 여행을 하다 일정을 줄여 3월에 한국으로 귀국하게 만든 장본인 남편의 친한 친구 결혼식이 결국 6월로 밀렸고 식을 마친 후 신혼여행을 간 참이었다. 모리셔스 대신 예약한 제주도 숙소는 굉장히 비쌌는데 심지어 그마저 방 2개의 풀 빌라로 업그레이드를 받았단다. 본인들은 스냅사진 촬영으로 하루 종일 그 좋은 곳을 비워두기 너무 아까우니 너희라도 와서 좀 뽕을 빼란다. 신혼여행에 친구를 초대하는 남다른 배포의 친구였다. 그렇다고 신혼여행에 눈치 없이 따라가는 사람이 있을 리... 여기 있다.

“어? 제주도? 지금? (버퍼링 중) 대박. 아 몰라. 일단 콜! 비행기 표 사자.”

버스 안에서 그 사이 남편은 비행기 표를 사버렸고 이륙까지 남은 시간은 불과 두 시간 반이었다. 월요일 퇴근 시간을 고려하면 공항버스를 일찍 타야 했다. 고로 나에게 남은 (짐 싸고 렌터카를 예약하는) 시간은 삼십 분도 채 되지 않았다. 큰 맘먹고 시킨 아이스라테가 아직 반이나 남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회사에서 배운 스킬(남에게 일 시키기. 회사에서는 ‘일 분배’라고 표현하지만 결국 본질은 같음)로 엄마에게 렌터카 예약을 부탁드렸고 그 사이 나는 집으로 달려와 캐리어를 꺼내어 옷과 충전선 따위를 우당탕탕 욱여넣었다. 이 와중에 비행기 표 예약을 하고 본인의 짐 리스트를 일목요연하게 보내온 남편과는 달리 나는 그냥 옷장에 있는 옷을 때려 넣음으로 우리의 확연한 성격 차이는 드러났다.

어쨌든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인사하고 다시 공항으로 나온 남편과 김포 공항에서 재회했다. 마치 야반도주하듯 공항에 와 익숙한 남편 얼굴을 보니 다시 세계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들었다. 몇 시간 전까지 무기력하다고 징징대던 같은 사람 맞는지? 그렇게 다녀온 제주도 2박 3일 여행은 약발 좋은 보약 한 첩을 먹은 기분이었다.


6월의 제주



일상에 익숙해질 때쯤 비 일상으로 넘어오니 일상이 다시금 새로워졌다. F5 새로고침 키를 누른 셈이다. 나에게 필요한 건 맛집에 가고 유명한 카페에 가는 것보다 고갈된 에너지를 급유하는 게 급선무였다. 그래서 벌써 두 번째 제주살이를 하고 있는 세계 여행 선배 메밀꽃 부부와 오래간만에 재회해 마음속 이야기를 터놓았다. 세계일주를 시작했을 때도 치앙마이에서 한 달간 동네 이웃으로 지내며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여행 후에도 이어졌다. 선배들 앞에서 막막하고 조급하다며 징징거렸다. 프리랜서 여행자 8년 차인 메밀꽃 부부는 치앙마이 때처럼 좋은 말을 많이 나누어주었다.

시간이 필요한 일에 조급해하지 말자고. 나에게 시간을 주기로 했으면 믿고 기다려주자고. 다시 한번 한 템포 천천히 인생을 살아보자고 다짐할 수 있던 고마운 시간이었다.

그리고 5개월 후 우리는 다시 제주에 왔다. 이번에는 조금 길게, 최소 한 달 이상 지낼 짐을 싸들고 내려왔다. 매번 제주도를 떠날 때마다 아쉬워서 이참에 길게 살아보기로 했다. 도피성으로 떠나왔던 5개월 전과는 달리 이번엔 할 일도 있다. 매일 꾸역꾸역 상품을 올리던 온라인 셀러 일은 그새 손에 익어 매일 편하게 할 수 있는 일이 됐다. 스타트업 일은 외부 미팅과 촬영은 모두 마친 상태라서 인터넷만 있다면 원격으로 병행할 수 있다. (도착하자마자 밤 9시에 미팅했다. 일하는데 아무 문제없음으로 판명남) 남편 역시 노트북만 있으면 주식 투자와 유튜브 영상을 만들어낼 수 있어 문제없다. 이번 제주살이로 세계 여행을 하는 내내 염원했던 디지털 노매드의 삶을 실험해볼 수 있게 됐다. 이번 제주에서의 시간은 우리에게 어떤 선물을 줄까?

이렇게 삶은 의지와 우연이 뒤섞여 우리를 재미있는 곳으로 데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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