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일년살이. 남편의 시선
어쩌다 보니 주변 사람들로부터 운이 좋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아마도 계획한 시기에, 계획한 만큼 세계여행을 하다 귀국했기 때문이리라. 코로나로 인해 당분간은 해외여행을 나가기 어려워졌기에, 우리 또한 참 운이 좋았다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세계여행을 계획한 기간만큼 다 채우지 못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여행하던 곳에서 고립되어 고생 끝에 겨우 귀국한 친구부부, 세계여행을 떠나기 위해 직장을 퇴사하고 이제 막 첫 나라를 여행하던 중 코로나가 심해져 귀국할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친구부부 등 주위에 코로나로 인해 여행 아니 인생계획이 바뀐 친구들을 보면 더욱 우리의 여행을 감사하게 된다.
제주살이를 시작하는 날짜도 참 운이 좋았다. 우리는 새해의 첫 월요일인 1월 4일 목포에서 짐을 가득 실은 차를 배에 실고 제주에 입도했다.
목포로 내려가는 길 군데군데 눈이 쌓여있었지만, 제주로 향하는 뱃길은 파고는 낮았고 하늘은 맑았으며 바다빛은 푸르렀다.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는 날 날씨가 맑아 기분이 좋았고, 올해는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서울에서 가지고 올 수 있는 건 최대한 차에 실어 내려왔지만, 여전히 필요한 생필품이 많았기에 우리는 다음날 제주시에 있는 이마트로 향했다. 허기진 상태로는 쇼핑하면 안 된다는 글을 어디선가 봤던 기억이 났지만, 아침식사 후 여유롭게 움직인 우리가 이마트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12시, 점심시간이었다.
혹시 모를 코로나 걱정에 외식하기보다는 장을 얼른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걸 택했다. 배가 고팠기 때문일까, 아니면 앞으로 1년이나 살게 될 거란 사실 때문이었을까. 우리의 카트는 1개만 뽑아온 게 아쉬울 만큼 가득 차다 못해 넘쳤고, 계산할 때 본 영수증에는 결혼 이후 마트에서 장보며 쓴 금액 중 최고금액이 찍혀있었다. 그렇게 한 달은 족히 먹을 식량과 생필품을 사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마 다음 날 저녁부터였던 것 같다. 제주도에 한파와 대설경보가 내려지고, 주요 도로들이 통제된 것은.
제주시와 서귀포를 잇는 1100도로와 5.16도로가, 한라산 산간도로인 제1산록도로 등이 전면통제되었고, 비자림로와 서성로, 번영로 등 제주의 소도시들을 잇는 도로들은 체인이 있을 때만 운행할 수 있었다.
그렇게 6일 밤부터 9일까지 나흘 동안 눈은 쉬지 않고 쌓여만 갔고, 우리 집과 바깥세상을 이어주는 작은 도로는 눈으로 막혀버렸다. 하지만 걱정될 건 하나도 없었다. 우리는 '운이 좋게도' 눈이 오기 하루 전날 한 달 치 식량을 사뒀던 덕이다. 직장에 매여있는 것도 아니고, 여행을 온 것도 아니기에 집에만 있어도 일을 할 수 있는 덕이었다.
세계여행부터 제주도 일년살이까지 참 운이 좋았다는 생각을 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우리가 2018년이 아닌 2019년에 세계여행을 계획했었더라면, 제주도 이사날짜를 하루만 뒤로 미뤘더라면 우리는 운이 없는 백수부부가 되었을까?
상황은 조금 더 힘들게 변했을 수 있지만 그 안에서 도전과 실패를 반복하며 길을 찾지 않았을까?
때로는 소소한 일들로, 때로는 조금 더 큰 일 속에서 소소한 행복과 행운을 찾지 않았을까?
그 속에서 '우리는 참 운이 좋은 부부야'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운이라는 건 어찌보면 누군가를 따라오기 보다는, 같은 선택을 두고도 결과를 긍적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하는 모든 선택과 결과에 대해, 좋았던 부분만 초점을 맞춰 살아간다면 누구나 '운이 좋은' 인생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폭염이 강타한 요즘, 때아닌 폭설 이야기라니 새로우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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