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일년살이. 아내의 시선
때로 장소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삶의 결이 달라진다. 내가 서울이라는 도시가 강제하는 소비의 규모에 허리가 휠 때면, 휴식 없이 달려만 가는 속도에 어지러울 때면 떠올리는 곳이 있다.
<여행할 땐 책, 김남희>
좋아하는 작가는 리스본을 지칭하며 이 문장을 썼지만 나에게는 제주도 같다고 생각하며 읽었다.
제주에 온 지 3주 차. 마트와 서점을 다녀오며 잠시 사려니 숲길에 들려 걸은 것 빼고는 대부분 집에 있었다. 40분이나 걸리는 이마트에 갈 때마다 전시상황처럼 식량을 쟁여놓은 탓에 외식 대신 집 밥을 해먹었다. 또 마트에 가는 건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그래도 떨어진 야채는 사야 하니 집에서 20분 거리인 고성 오일장이 열리는 날을 벼르다 다녀왔다.
새벽 네다섯시부터 시작한다는 이 작은 시장은 오후 한 시에 갔더니 벌써 파장 분위기였다. 감자 삼천 원, 표고 오천 원, 배추 한 알에 천 원 그리고 집에서 입을, 근본 없지만 따뜻한 극세사 바지 오천 원까지. 신나게 쇼핑을 했다. 가만 생각해보면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오일장 쇼핑은 첫 경험이었다. 친구들이 새벽, 로켓 배송으로 장을 볼 때 오일장에서 장을 보는 온도차에 웃음이 났다.
시장을 가는 길에는 한라산이 어느 각도에서 잘 보였다. 3주를 살면서 몰랐는데 집 앞 길가만 나와도 정상에 눈이 덮인 한라산이 보였다. 이런 로또 같은 날에 바로 집에 들어가긴 아쉬워 용눈이 오름으로 향했다. 용눈이 오름이 올 2월부터 2년간 휴식기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접한 터라 부리나케 다녀와야 했다. 오르고 내려오는 길 내내 남편과 세계여행을 추억하는 풍경을 만났다.
“여기 스리랑카 립톤싯 올라가던 길 같아”
“엇, 여기는 스리랑카 하퓨탈레에서 우리가 맨날 가던 그 식당에서 보던 전망이야”
아시아 여행 중 가장 압도적이었던 스리랑카가 연상되는 용눈이 오름에 동네 마실 나오듯 올 수 있다는 사실에 전율했다. 제주에 내려오기 전에는 날이 좋으면 호수 공원이나 한강으로 뛰쳐나가곤 했다. 이제는 스케일이 커져 10분을 달려 바다, 20분을 달려 한라산이 보이는 오름에 간다.
세계여행을 하며 타지마할이나 피라미드 같은 압도적인 곳을 볼 때마다 '출세했다'고 말했다. 제주에 살며 자연과 가까이하는 요즘도 비슷하다. 가끔 승승장구하는 친구들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뗏목에서 둥둥 떠내려가는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이런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우리는 우리만의 행복의 공식을 만들어가는 거니까.
제주에 진작 올 걸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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