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순이가 된 미니멀리스트 꿈나무의 비법
외부에서 에너지를 얻는 편이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새로운 공간을 가보는 것도 좋아한다. 그림 같은 집에서 지내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다. 집도 좋지만 주기적으로 나갔다 와줘야 활기가 생긴다. 이런 내가 새해에는 부쩍 집순이가 되었다. 가계부와 냉장고 정리 덕분이다.
지난 주말 집에 들어앉아 작년의 소비 내역을 한 땀 한 땀 가계부에 옮겨 적었다. 수입과 지출을 결산해보는 ‘연말 결산’을 한 셈이다. 맛있는 음식, 안 먹어본 맛, 요가 수업 등 ‘경험’에 돈을 아끼지 않는 편이다. (그러니 세계여행도 500일이나 넘게 탕진하며 다녀왔겠죠?) 특히 의식주 중에 ‘의’에는 극히 관심이 없는 대신 ‘식’에 가중치를 둔다. 그래서일까. 결과는 가관이었다.
지난 화에서 남편이 언급한 책 <숲 속의 자본주의자>에서 저자는 4인 생활비가 80만 원 정도라고 밝혔다. 서울도 아닌 미국에서, 심지어 시애틀 근교에 살면서! 시애틀을 여행해보니 서울 물가보다 비싸면 비싸지 싼 곳이 아님을 잘 알고 있는데! 이 문장을 읽고 큰 충격에 빠졌고, 가계부를 쓰고 나니 더 큰 탄식이 새어 나왔다.
우린 2인 가정인 데다 애도 없는데 평균 월 삼백 만원 언저리를 썼다. 피곤하다는 핑계로 직장인처럼 외식과 밀키트를 일삼은 결과다. 일 년만 살 줄 알았던 제주라서 먹고 싶은 것에 인색하지 않았다. 부지런히 이곳저곳 좋다는 곳을 돌아다녔다. 아직도 못 가본 데가 수두룩 빽빽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좋은 공간은 생겨나고 있는데도 돈을 많이 썼다.
가계부 작성과 함께 냉장고와 팬트리 정리를 했다. 이사 가기 전 짐을 줄이는 차원에서 식재료는 뭐가 있나 다 꺼내어 들여봤다. 가계부만큼 냉장고 정리도 충격적이었다. 유통기한이 반년은 지난 새우젓, 9월까지였던 유부초밥이 있었다. 유부가 취두부가 될 때까지 매일 냉장고를 열어보면서도 몰랐다. 밖에만 신경 쓰느라 안은 곪아가고 있었다.
이래서 미니멀리스트들이 정리를 찬양하는 것인가. 통장과 냉장고를 정리하니 채움에 대한 욕구가 적어지는 대신 비움에 대한 욕심이 커졌다.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이 왔다 갔다 하듯이 채움과 비움에 대한 마음도 변한다. 올해는 주기적으로 멈춰서 내가 가진 것을 돌아보고 살뜰히 챙겨나가며 그때그때 비우며 지내고 싶어졌다.
작년 가계부에는 거의 단 하루도 소비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대오각성’한 올해 1월은 가계부가 매우 가볍다.
다행히도 바깥 날씨도 춥고 흐린 날이 많아 바깥으로 나가고 싶은 의욕이 꺾였다. 요즘엔 따뜻한 집에서 냉장고 파먹기를 하며 가지고 있는 재료들을 이리저리 조합해 요리를 해 먹는 재미와 가벼운 가계부를 보는 뿌듯함이 더 크다.
거의 격일로 하던 외식은 주 1회 정도, 습관적으로 사 먹던 과자와 술, 카페에서 시키던 디저트만 줄여도 몇 십만 원은 아껴질 것이다. 인플레이션 시대에 가진 것을 활용하며 가볍게 살아보자. 건강은 덤으로 따라오지 않을까?
이 산뜻한 기분을 오래 유지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