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혼자 파리 여행 1. 트렌치코트
미국 교포 출신 영어 선생님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선생님 : 뭐랄까. 파리에 가면 누군가가 당신의 돈을 훔쳐가지만 뉴욕에 가면 누군가 당신에게 총을 겨누면서 돈을 달라고 할 거예요.
나 : 헉!
작년, 나는 혼자 파리 여행을 다녀왔다. 불면증이 있던 터라, 시차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역시 나의 큰 고민거리 중 하나였지만 흉흉하기로 소문난 유럽의 소매치기 또한 나의 또 다른 고민거리였다.
정보 공유에 진심인 나라인 대한민국답게, 여러 유튜버들과 블로거들은 어떻게 하면 소매치기를 방지할 수 있는지에 대해 자세히 써두었다. 휴대폰과 손목을 이어주는 각종 스트랩들, 기차를 여행을 할 거라면 캐리어와 짐칸 기둥에 자전거용 자물쇠 추천 등등. 여행 준비를 하며 나 또한 여러 아이템들을 야금야금 사들였다.
그런데 막상 파리에 가고 보니 이 아이템들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건 바로 날씨라는 녀석의 변덕 때문이었다. 작년 9월의 파리는 엄청나게 추웠다. 우버를 타고 이동하며 나는 드라이버에게 "이맘때쯤의 파리는 원래 이렇게 추운가요?"라고 물었더니 우버 드라이버는 "그렇지 않다"라고 하며 나에게 unlucky 하다는 말을 해주었다.
'아마도 더울 것이다'라고 말해주었던 프랑스 친구의 조언에 따라 여름옷을 잔뜩 준비해 갔지만 유럽을 유행하는 7일 동안 정작 매일 입고 다녔던 옷은 혹시 몰라 챙겨간 긴팔 트렌치코트뿐이었다. (못 입은 옷들은, 챙겨간 게 아쉬워 호텔에서 입고 인증숏만 찍어두었다.)
어쩌다 보니 단벌 숙녀가 되어 파리 이곳저곳을 누비는 동안, 나는 한 번도 소매치기를 당한 적이 없는데 그건 바로 이 트렌치코트 덕분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이 트렌치코트는 주머니가 아주 깊다. 꼭 챙겨야 하는 것들을 잔뜩 넣고 다녀도 될 만큼.
참고로 이 옷은 연식이 꽤 된다. 몇 년 전에 산 옷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 트렌치코트의 주머니 깊이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한국에서는 소매치기를 당할 확률이 거의 0.1%도 안 되니, 굳이 주머니에 물건을 넣어야겠다는 생각을 안 했으므로.
휴대폰, 여권, 작은 카드 지갑. 여행하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들은 모두 이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그래도 아예 가방을 안 들고 다닌 건 아니다. 가방에는 립밤과 핸드크림 같은 것들만 넣어 가지고 다녔다. 아마 소매치기들이 내 가방을 가져갔다면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쳇, 기껏 가방까지 털었건만 이런 것밖에 없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가방을 멘 이유는 혹시 기념품을 사고 싶을 수도 있다는 이유 때문.
하지만 이 낱장의 면직물만으로는 파리의 추위를 견딜 수 없어 결국에는 ZARA에서 여벌의 니트를 더 샀지만 그 위에 이 트렌치코트만큼은 꼭 걸치고 다녔다.
어쩌다 보니 나의 파리 여행에 대한 기억 중 하나는 바로 이 트렌치코트가 되었다. 이 글을 쓰는 시점은 2월. 한국은 완연한 겨울이다. 그러다 보니 이 트렌치코트는 침대 아래 수납장에, 여러 여름옷들과 함께 들어가 있지만 종종 수납장을 열 때마다 보이는 트렌치코트를 보면 늘 파리가 생각난다. 여행 후, 이미 한번 세탁소에 드라이클리닝을 맡겼으므로 파리에서 묻혀 온 잔여물(?)들은 전부 다 떨어져 나갔을 테지만 트렌치코트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파리의 추억은 아직도 내 머릿속에 여전하다.
다시 가야지. 언젠가는 꼭 다시 가야지. 기왕 간다면 이번엔 파리가 아니라 리옹이나 릴이나 스트라스부르 같은, 새로운 도시에 가봐야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오늘도 초특가 항공권이 없는지, 여행 어플을 틈만 나면 들여다보고 있다. 기내가 두려운 불면증 환자여도 상상은 할 수 있는 거니까.
(그리고 나는 그 상상을 현실로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