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없이 좋은 밤 보내세요
파리 샤를드골 공항에 도착하고, 짐을 찾은 후 밖으로 나왔을 때 제일 처음 찾아든 감각은 '춥다'는 것이었다. 출국 전부터 '파리 9월 날씨'를 수십 번 검색했었다. 유럽 날씨는 하도 왔다 갔다 하는 게 일상이니 두꺼운 옷을 꼭 챙기라는 말이 많았다. 파리의 변덕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심했다. 9월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늦가을 같았다.
나는 원래 추위를 많이 탄다. 하지만 진동하는 휴대폰처럼 온몸을 벌벌 떨었던 이유는 체질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거의 스무 시간에 달하는 비행. 그동안 불안, 불면 증상을 견디며 비행기에 펑펑 울었으니 컨디션이 저조할 수밖에.
호텔로 가는 택시 안에서는 오한 비슷한 증상까지 일기 시작했다. 이 순간에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택시 뒷자리에 거의 뻗다시피 누워 제발 파리의 교통체증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바라는 것뿐이었다. 호텔에 도착해서 체크인을 하는 동안에는, 제발 이 친절하신 금발의 숏컷 여성 직원분께서 한시라도 빨리, 방 한 칸이라는 축복을 내려주길 매초마다 바라고 또 바랐다.
드디어 도착한 호텔에서 나는 무작정 짐부터 풀었다. 정리를 하려는 위함은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곧장 잠에 들어야 한다. 그러나 파리의 날씨는 춥다. 잠옷이 되어줄 만한 편한 옷들을 마구 껴입기 시작했다. 혹시 몰라 두꺼운 티셔츠 위에 니트로 된 카디건, 또 위에 더 두꺼운 카디건을 입고 나서야 춥다는 느낌이 사라졌다.
이제 잘 시간이다. 마음 같아서는 비행한 시간만큼 자고 싶었다. 그러나 불면증 환자에게 수면 시간은 파리의 날씨처럼 예측할 수 없다. 한국에서조차 어떤 날은 잘 자고, 어떤 날은 한참을 뒤척이다 잠드는데 과연 이 머나먼 나라에서 내가 잘 잘 수 있을까?
나는 내가 착한 환자라고 생각했다. 의사가 정해준 약을 아주 성실히 같은 시간에 먹는 착한 환자. 그러나 파리에 도착한 첫날, 나는 정신과에 드나든 지 2년 만에 처음으로 나쁜 환자가 되었다. 못 잘 것 같다는 두려움에 이틀 치 약을 한꺼번에 삼키고 잠에 들어버린 나쁜 환자.
그날, 나는 16시간을 잤다.
이 밤 그날의 반딧불을
당신의 창 가까이 보낼게요
사랑한다는 말이에요
-아이유 <밤편지>
불면증에 시달리다 보면 밤에 대한 표현이 많아진다. 잘 잤어? 이 일상적인 안부 인사에 대해 주절주절 말이 많아진다.
오늘은 깨지 않고 오롯이 잠으로만 시간을 채웠어.
오늘은 좀 뒤척였어.
약을 먹고 집에 불을 끄고. 나는 그 후에는 절대 휴대폰을 만지지 않아. 시간을 보지 않는 거지. 시간을 보는 순간 쫓기는 느낌이 드니까.
시간을 호기심으로만 내버려 뒀더니 머릿속에 더 복잡해져. 예를 들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가수 아이유는 <밤편지>라는 곡이 가진 가사에 대해 설명할 때, 그 사람이 깰까 봐 연락을 하지 않는 게 사랑인 것 같다고 했다. 요즘의 나는 아끼는 사람들에게 꼭 이렇게 말한다.
꿈 없는 좋은 밤 보내.
그 꿈이 흉흉했든 즐거웠든 슬펐든, 흉몽이든 길몽이든, 당신이 눈을 떴을 때 꿈이라는 잔상을 곱씹으며 하루를 시작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당신의 내일이 온통 편안했으면 좋겠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 모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