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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증 환자가 여행 시 챙겨야 할 세 가지

영문 증명서, 안대, 화장품의 환상적인 조합

by 이진리

그토록 바라고 바랐던 파리 여행. 반드시 혼자 가고 싶었던 그곳으로 떠나길 결정한 후 나는 고민에 빠졌다. 불면증 약을 들고 비행기에 탈 수 있을까?


위탁수화물로 부치는 것까지는 가능할 것 같은데 과연 기내에도 반입이 가능할지가 궁금해졌다. 불면증 환자가 이 세상에 나밖에 없는 것은 아니라는 희망을 품은 채, 여행 후기를 뒤지기 시작했다. 나의 눈길을 끈 것은 준비성 철저한 누군가가 '혹시 몰라 영문증명서를 발급해 갔다'는 것이었다.



-불면증 환자의 버팀목, 영문 증명서


예약한 날짜에 정신건강의학과에 방문한 나는 의사 선생님께 물었다. "제가 조만간 해외여행을 갈 것 같은데 혹시 영문 증명서를 가져가야 할까요?" 의사 선생님은 '혹시 모르니' 가져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하셨다.


KakaoTalk_20250125_212135660.jpg 영문 증명서 발급 비용은 4만 원이었다


혹시 몰라 발급받은 이 증명서는, 다섯 개의 알약이 든 약봉지가, 절대 이상한 의미의 약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낱장의 종이에 불과한 이 영문 증명서가 마음을 이토록 편안하게 해 줄 줄이야.


그리고 비행기에 오르며 생각은, 세상은 생각보다 불면증 환자에게 각박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파리를 갔다 왔을 때도, 그리고 두 달 뒤 두바이 여행을 갔다 왔을 때도 나는 이 종이와 불면증 약을 챙겨 갔지만 그 어떤 공항의 관계자도 나에게 이 약의 정체를 묻지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 어떤 곳으로 여행을 가든, 나는 이미 꼬깃꼬깃해진 이 종이를 함께 가져갈 생각이다.




-인공적인 밤을 버티게 해주는 나의 구원자, 안대


비행기는 새로운 시간대를 만들어낸다. 정해둔 시간대에 밥을 준다. 그리고 곧 불을 꺼버림으로써, 인공적인 밤을 완성한다. 그 밤에 절대 적응하지 못하는 불면증 환자로서는 그 밤이 너무나도 길고 괴롭다.


이코노미 좌석에서 허락된 자유 공간은 한 뼘도 되지 않는다. 어떻게든 편안한 자세를 찾아보려 이리저리 비트는 몸보다 괴로운 건 사실 눈이다. 계속 감고 있어도 눈에는 차곡차곡 데미지가 쌓이는 눈은 참 원망스럽게도 자주 뜨였다. 누군가 잔여 시간을 확인하려 기내 화면을 켤 때, 누군가 휴대폰 불빛을 켜 주변을 살펴볼 때 등등. 잠을 못 자 오히려 예민해진 오감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눈을 뜨면 더욱 피로해질 거란 걸 알지만 어쩔 수 없이 뜨게 된 눈은 시리도록 건조했다.


파리행 비행기에서 나는, 코로나가 다시 심해지고 있다는 뉴스 기사를 보고 챙겨간 마스크를 안대 대신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파리에서 다시 인천으로 돌아오는 기내에서, 항공사 로고가 새겨진 안대를 끼고 있는 승객을 보았다. 나는 얼른 승무원을 불렀다.


KakaoTalk_20250125_211940828_04.jpg 베트남 에어라인의 안대


비행기를 타는 승객들 손에 심심치 않게 들려 있는 목베개보다(베개가 있어도 어차피 못 자니까) 나에겐 안대가 훨씬 더 유용했다.



KakaoTalk_20250125_211940828_08.jpg 대한항공의 안대

두바이 여행을 갈 때는 이륙 전부터 안대를 줄 수 있겠냐고 부탁했다. 기내식을 먹을 때 달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때는 승무원들도 정신이 하나도 없을 때니까. 기왕이면 미리 요청하고 미리 받아두니까 훨씬 더 마음이 놓였다.





-못 잘 바에는 차라리......, 피부라도 지켜야 하지 않을까


비행기 안은 사막보다 건조하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그리고 해외여행을 하면서 물이 안 맞아 피부가 망가진다는 이야기는 유튜브 쇼츠에도, 블로그 후기에도 참 많았다. 그 얘기를 듣고 기내 반입 가능한 용량의 화장품들을 챙겨갔다.


만약 챙겨가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는 불면증과 피부 건조, 두 가지 고통과 함께 싸워야 했을 것이다. 이것저것 챙겨간 화장품 덕에 그래도 피부 건조라는 녀석과는 정면으로 맞서지 않을 수 있었다.


KakaoTalk_20250125_211940828_05.jpg 간식은 됐고 차라리 수분 충전


먹을 걸 줄 때, 기내는 인공적인 낮을 만들어 승객들을 깨운다. 곧 소란해진 기내를 모른 척하고 안대 쓴 채 있고 싶지만 승무원들의 친절한 목소리와 승객들이 만들어내는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모른 척하기가 힘들다.


차라리 입에 뭐라도 넣으면 좀 괜찮으려나. 씹는 동안은 그래도 불면이라는 녀석이 잠시 잊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안고 간식을 받아 들었지만 포장지를 여는 순간 코끝을 찌르는 피자 냄새는 오히려 속을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결국 한 입도 못 먹은 피자는 옆에 치워두고 나는 가방을 뒤져 마스크팩을 꺼냈다. 어차피 뜬 눈으로 견뎌야 하는 인공적인 낮. 음식물을 채워 넣기보다 차라리 피부에 수분이라도 채워 넣자는 생각은 꽤나 괜찮은 생각이었다. 그래도 몸 중에서 한 곳쯤은 살 길을 마련해줘야 하지 않을까.


미안하게도 나는 내 몸이 가장 원하는 '잠'이라는 선물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차라리 다른 선물을 주었다. 최선을 다하지 못하니 차선이라도 다하자는 마음이 비록 약간은 슬펐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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