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는 여행지라는 유토피아로 향하는 아찔한 감옥이었다
원래 내가 산 비행기 티켓은 파리 샤를드골 공항 직항 편이었다. 출국을 앞둔 불과 약 12시간 전, 출국이라는 단어를 곱씹던 내게, 먹고 있던 햄버거의 패티 향기가 무색해질 정도의 황당한 소식이 찾아왔다.
새로 예약이 되었다니? 그것도 두바이를 경유해서? 남은 햄버거를 입에 쑤셔 넣고 집으로 돌아와 상황을 파악한 결과, 내 비행기 티켓은 정말로 두바이 경유행으로 바뀌어 있었다. 원래 내가 예상했던 파리 도착일은 9월 8일. 그런데 바뀐 티켓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네가 파리에 도착하는 날은 9월 9일이 될 거야.
하루 늦게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든 첫 번째 고민은 호텔 예약과 관련한 것이었다. 9월 8일에 체크인하는 것으로 예약을 진작 마친 상황. 그러면 하루치 숙박비를 다 날리는 것인가? 곧장 부킹 닷컴에 들어가 호텔 쪽에 메시지로 문의를 넣었다. 비행기가 갑자기 변경되어 하루 늦게 도착할 것 같은데 혹시나 하루치 숙박비를 환불받을 수 있냐고. 호텔 측에서는 그건 불가능하다는 당연한 답장을 해왔다. 절망하지는 않았다. 일주일 전도 아니고 불과 하루 전에, 그것도 딱 하루치 숙박비만 환불해 주는 관대한 호텔은 아마 이 세상에 없을 테니.
온갖 항공사의 직항 티켓을 다 찾아봤지만 무슨 일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9월 8 일행 직항 티켓은 구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아까운 하루치 숙박비를 가지고 호텔에 대고 생떼를 써봤자 아마 내 소소한 영어 실력만 들통나 무색해질 것이고 혼자 가는 여행이니 이 마음 아픈 사실을 전달해야 할 동행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런데 이로부터 몇 시간 뒤, 에어프랑스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내 비행기가 이틀 뒤로 새로 예약되었다는 연락이었다. 이 순간 그나마 돌려놓은 긍정 회로가 고장 났다. 내가 잡아둔 여행 기간은 고작 일주일. 그런데 이미 하루가 날아가 버린 상황인데 여기서 하루가 더 날아간다고? 아직 비행기도 안 탔건만 뭐가 이렇게 자꾸 날아가나.
어차피 직항 비행기는 없으니 일찍이 이 부분은 희망을 접었다. 하지만 적어도 9월 9일에는 파리에 도착해야 한다는 불타는 의지로 (우선 에어프랑스 쪽에 환불 연락을 넣어놓은 뒤) 새 비행기를 찾기 시작했다. 그나마 찾은 비행기는 하노이를 경유해 파리로 가는, 무려 19시간 55분이 걸리는 베트남 에어라인이었다. 출국 8시간 전에 예약하는 바람에 경유 티켓의 가격이 직항 티켓보다 비싼 상황이었지만 나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미리 싸둔 24인치 캐리어와 함께 도착한 인천공항에서, 나는 분명 하노이에서 파리로 경유를 해야 하는데 왜 하노이까지만 가는 티켓을 주나 싶은 어리둥절한 상황에 처했다. 티켓 발권을 도와준 승무원에게 파리로 가는 티켓은 어떻게 받아야 하냐고 물었더니 현재로서는 발급이 어렵다는 알쏭달쏭한 이야기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경유하는 과정에서 문의해 봐야 한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나는 '결제는 됐으니 내 자리 하나는 있겠지'라는 생각으로 큰 고민 없이 하노이로 향했다. 그리고 4시간 뒤, 노이 바이 공항. 새 티켓을 발급받으러 간 곳에서 "지금 모든 좌석이 풀 부킹 상태야."라는 베트남 에어라인 직원의 이야기를 듣고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WHAT?"
이때 했던 베트남 에어라인 직원의 말이 나는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I CAN HELP YOU."
약 20분간의 기다림 끝에 (이 20분이 꼭 200분처럼 느껴졌었다.) 나는 20A 좌석을 배정받을 수 있었다. 풀 부킹이어도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항공사에서는 한두 자리를 빼놓는다. 아마도 나는 그 '혹시 모를' 자리에 들어간 것 같았다.
좌석 이름에서 볼 수 있다시피 20A 좌석은 창가 자리였다. 그리고 하노이에서 파리로 가는 약 14시간 55분의 비행시간 동안 나는 내 비행기 좌석 취향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나는 창가보다 복도 쪽 좌석을 훨씬 좋아하는 사람이다. 불면증 환자이자, 불면의 근원이 불안인 사람에게 이코노미 창가 자리는 감옥과 다를 바 없기에.
사방이 나를 가로막고 있다. 내 몸은 이미 잠들었는데 뇌가 억지로 내 몸을 깨우고 있으니 근육들은 경련이라는 시위 피켓을 들고 열심히 파업을 선언 중이다. 이코노미 좌석은 옆 사람의 체향을 공유해야 할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 있다. 그리고 옆에서는 누군가가 쪽잠을 자고 있다. 누군가를 부러워하는 감정으로, 나의 병명을 원망하는 감정으로 꼬박 14시간을 견디는 동안 몸이 너무 고통스럽고 불안이 너무 심해지면 눈물이 나온다는 걸 그때 알았다. 소리 내 울고 싶었지만, 나는 불면증 환자이기에 불면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잘 아는 알기에 그 사람을 깨우지 싶지 않은 아이러니한 마음으로 눈물만 뚝뚝 흘렸다. 당장이라도 나를 여기서 풀어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여기는 비행기다. 약 2분에 한 번씩 정차하는 서울 지하철 2호선이 아니었다.
덜 갇혀 있는 느낌이 들어서 복도 쪽 자리를 좋아한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또다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여행지는 주로 14시간 정도 걸리는 먼 곳들이다. 예술이 있는 곳. 건물이 아름다운 곳. 걷는 동안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는 곳. 가고 싶은 곳은 많지만 비행은 무섭다. 이코노미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숨이 막힌다. 비즈니스를 타면 어떻냐고? 나도 잘 모르겠다. 한 번도 타본 적이 없어서. 불면증 환자에게 비즈니스 좌석이란 그저 조금 더 큰 감옥에 불과할지, 10분이라도 잘 수 있게 만들어주는 순간의 유토피아인지 나는 아직 잘 모른다.
좋아하는 것을 잘 좋아하며 사는 게 나의 목표 중 하나다. 그걸 이룰 수 있는 수단 중 하나가 여행이이건만. 타국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불면이라는 녀석이 내 삶에 가부좌를 튼 후부터 삶의 한쪽이 찌그러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