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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겪은 이상하고 황당한 일들

여자 혼자 유럽여행 5. 파리는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어

by 이진리

비행기에서 불면과 싸우는 동안, 결국 불면에게 KO패를 당해 찔찔 우는 동안에도 어쨌든 비행기는 프랑스를 향해 날아갔다. 예약해 둔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곧장 침대로 향했고 무려 16시간을 잤다. 잠을 자느라 하루를 통째로 날려 먹은 셈이지만 그 16시간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이 정도의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않은 채 관광을 시작했다면 나는 파리 거리 한복판에서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뻐근한 몸을 조식과 샤워로 깨운 후 나는 곧장 호텔을 나섰다. 정해둔 목적지는 없었다. 때로는 사람들이 많이 가는 방향으로 따라가기도 하고 때로는 '여기로 가면 뭐가 나오지?'라는 생각으로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약 15분 정도 그것도 구글 맵도 켜지 않은 채 정처 없이 걸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많은 거리가 나왔고 나는 어딘가 익숙해 보이는 건물을 만났다. 루브르였다.



1. 루브르에서 한바탕 혼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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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항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한국 어플로 루브르 예약을 시도했지만 계속해서 실패했기에 루브르에 갈 생각은 일찌감치 접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혹시 현장 발권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입구 쪽을 기웃거려 봤지만 역시나 대기줄이 많아서 들어가는 게 불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루브르 주변의 정원과 키보드 하나를 앞에 두고 노래를 부르는 거리의 악사를 살피는 재미가 있었기에.


그래도 사진은 찍어야지. 루브르를 배경으로 셀카를 찍고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데 갑자기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든 사람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는 다짜고짜 자신이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무료 서비스는 아니었다. 어차피 현금도 없었기에, 생각 없다며 거절했지만 그는 자꾸 내 뒤를 따라왔다.


"너 지금 되게 뷰티풀해. 사진 찍어줄게!" 여러 번 거절하며 걸음을 빨리 했지만 그 사람은 여전히 나를 쫓아왔고 결국에는 "너 지금 나이스하다니까? 왜 안 찍어!"라며 화 아닌 화 비슷한 것을 냈다. 파리에서 한바탕 혼이 날 줄이야.




2. 파리 사람들은 전부 아이언 맨인 걸까


그리고 파리에 도착한 지 4일 째였나. 오페라 가르니에 구경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는데 오페라 가르니에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화창하던 날씨는 온데간데없었다. 비라고 표현할 수 없는, 사실상 우박에 가까운 것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유럽의 날씨는 변덕이 심하다는 말에 나는 작은 우산을 챙겨갔기에 당연히 가방에서 우산을 꺼냈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 우박의 입자는 더욱 굵어졌다. 비를 막아주는 우산에서 퍽퍽 소리가 날 만큼.


나처럼 우산을 쓰고 있는 사람도 종종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산을 안 썼다. 한국에서는 갑작스럽게 비가 내리면 편의점 앞에 일회용 우산을 내놓고 파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데 파리의 거리 어디에서도 우산을 내놓고 있는 곳은 없었다.


거리를 걷는 많은 사람들은 그 우박을 아무렇지 않게 맞고 다녔다. 나에게는 갑작스러운 비였지만 프랑스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에게는 대비할 수 있는 비였을 수도 있다. 이들은 춥지 않은 걸까. 우박이 머리카락에 달라붙어 있는데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한 번 놀랐고 저녁을 먹으러 다시 호텔에서 나왔을 때 나는 두 번 놀랐다.


우박이 그치고 나서 날씨가 부쩍 쌀쌀해진 상황이었다. 호텔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했지만 그냥 들어가기 아쉬워 근처의 BAR에 갔는데 이것저것 껴입고 나온 나와 달리, 딱 봐도 얇아 보이는 외투 하나만 입고 테라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오페라 가르니에에서 기념품으로 사 온 노트에 한국어로 글을 끄적이는 내내 테라스는 만석이었다. 반팔 티셔츠만 입고 있는 사람이 신기해 곁눈질을 하기도 했는데 그 사람은 떠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KakaoTalk_20250303_215627393.jpg 취미 발레를 하는 나에게 딱이었던 오페라 가르니에의 기념품. 생각나는 것들을 끄적이는 동안 프랑스 사람들은 테라스에 앉아 쉬지 않고 말을 하고 있었다.

프랑스 사람들의 테라스 사랑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추위를 견디는 놀라운 능력에 대해서는 처음 알았다. 그리고 이때 문득 이들은 겨울에도 테라스를 사랑할 것 같은데 과연 어디까지 껴입을지에 대한 소소한 한호기심이었다.




3. 전화번호를 물어보던 우버 드라이버


유럽까지 왔으니 국경은 넘어봐야지. 그런 생각으로 예약한 룩셈부르크행 TGV. 어깨에 메는 가방과 손에 드는 가방 하나만 챙겨 갈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챙길 짐이 많아졌다. 꽤 무거워진 가방을 들고, 안 그래도 낯선 파리에서 기차역까지, 버스를 타고 갈 엄두가 나지 않아 나는 우버를 불렀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버 드라이버는 내게 말을 걸었다.


"너 어디서 왔니. 혹시 중국인이니. (아니. 나 한국에서 왔어,라고 말했더니 미안하다며 자기가 본 아시안 중에서는 중국인들이 가장 많아서 중국인인 줄 알았다고 고 말한 걸 보면 인종차별적 발언은 아니었다.) 기차 타고 어디 갈 생각이니. 아, 룩셈부르크. 나도 거기 몇 번 가봤어. 하루 정도 갔다 오기 좋은 나라야."


나름 즐거웠던 대화는 파리 동역으로 가는 내내 이어졌다.


"내일 돌아온다고 했지? 내일은 뭐 할 생각이야?"

"그다음 날에 출국하니까 마지막으로 파리를 한번 둘러볼까 해."

"내가 도와줄까?"

"?"


갑자기 그는 왓츠 앱 아이디를 물었다. 아니, 그러다가 갑자기 그냥 자신의 왓츠 앱을 알려주겠다며 빨리 왓츠 앱을 켜라고 했다. 내가 우물쭈물하고 있는 동안 그는 이미 AI에게 한국 코드 번호를 검색해 알아냈고 내 전화번호를 물었다. 내 전화번호를 가져간 우버 드라이버는 내 번호로 전화를 걸어 친히 자신의 번호를 알려주기까지 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순간. "내일 전화할게!"라며 웃던 그는 내가 파리 동역에서 헤매는 것까지 지켜보면서 "저쪽으로 가야 돼!"라며 알려주기까지 했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나는 TGV 안에서 왓츠 앱을 탈퇴했다.


룩셈부르크에도,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거는 비슷한 일이 있었다. 아름다웠던 그때의 파리. 때론 나를 당황시키기도 했던. 지금 이 순간에 파리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알 수 없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파리의 날들이 지금은 많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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