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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수면제

by 이진리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불면은 갑자기 온 손님이 아니었다. 잠들지 못해 침대에서 뒤척이는 시간이 3시간, 5시간, 이런 식으로 점점 늘어나는 식으로 전조 증상을 보여왔다. 혼자 이겨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약 없이 버텼을 시절.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잠 못 이뤄본 시간은 최대 19시간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몸은 잠을 자야만 굴러간다. 몸이 오롯이 피로와 피곤에 휩싸였을 때 거의 기절하듯 잠들곤 했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잠든 시간은 고작 3~4시간. 정신건강의학과에 제 발로 찾아간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더 이상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없을 때 건너야 하는 게 정신건강의학과의 문턱이라는 걸.


수면 박탈에 가까운 상태로 유지되다 고작 몇 시간을 자고 일어나 생활하던 시절. 만약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나는 나에게 '버티지 말고 제발 병원에 가라'라고 애원할 것이다. 네가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이건 확실한 병이라고 꼭 말해주고 싶다.


수면제를 비롯한, 지금 내가 먹고 있는 약들은 나에게 있어 너무 중요한 녀석들이다. 요즘도 여전히 몇 시간 정도 뒤척이는 때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하루 이상 이어지지는 않는다. 비행기 이코노미 좌석이라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그 정도 수준의 수면 환경이 아닌 이상 나는 그래도 그럭저럭 잘 자고 있다.





나는 지금 수면제를 비롯해 총 5알의 약을 먹고 있다. 졸음을 유도하는 약, 수면 상태를 길게 유지해 주는 약 등등. 그렇지만 처음부터 수면제를 처방받은 건 아니었다. 정신건강의학과에 첫 발을 디뎠을 때만 해도 나는 졸음이 유도하는 약과 수면을 유지해 주는 약만을 처방받았다.


처음 약을 먹었던 날의 밤. 약을 삼킨 후 '정신과까지 갔다 왔는데 잠이 또 안 오면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을 안고 침대에 누워 있던 순간의 기억은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걱정이 무색하게 점점 졸음이 찾아왔고 나는 어느 순간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뜬 시간은 아침 8시. 불면증을 혼자 버티던 시절. 아침 8시까지 못 자본 날이 얼마나 수두룩한데. 맙소사. 오전 8시에 일어날 수 있다니. 아침에 일어나 본 게 얼마만인가 싶어 자연스럽게 정신과 약이 고맙게 느껴졌지만 그건 너무 이른 축하였다.


약은 부작용이라는 친구를 꼭 데리고 다닌다. 내가 처음 느낀 부작용은 메스꺼움이었다. 아침을 먹으려 하는데 갑자기 속이 메스꺼워지기 시작했다. 음식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렸다. 불면증을 혼자 버텨내던 시절에도 느껴본 적 없는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은 느낌.


나는 곧바로 내과로 향했다. 오늘 당장 할 수 있고 바로 결과를 들을 수 있는 검사를 몇 개나 해봤지만 이상 소견은 없었다. 평소에도 이랬냐는 내가 전문의의 질문에 나는 아니라고 답했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었냐는 질문에 나는 어제부터 정신과 약을 먹기 시작했다고 이야기했다. 내과 전문의는 그 약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고 했다.


병원을 나오면서 나는 다시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정신과였다. 증상을 이야기했더니 나의 주치의 선생님은 어떤 특정 약 하나를 집어주며 그 약을 빼고 먹으라고 헸다. 시키는 대로 해봤더니 전보다는 조금 괜찮아지긴 했지만 약간의 메스꺼움은 여전히 남아 있어서 나는 남아 있는 시간대 중 가장 빠른 시간대로 예약을 바꿔 다시 정신과를 찾았다.


아마 지금까지 바꿔 복용한 약의 종류만 해도 10개가 넘을 것이다. 졸음을 유도하는 약이 갑자기 제 할 일을 못하게 되어 용량을 조절하다 결국 수면제를 추가했고, 졸음을 유지하게 해주는 약 또한 효과가 부족하다고 느껴 종류와 용량을 계속해서 바꿨다. 그동안 크고 작은 부작용들을 있었지만 그래도 이 과정을 거치며 어느 정도 내 몸이 거부하지 않을 정도의 약을 찾아냈다.


그렇게 그 약을 약 2년 정도 복용해 왔다. 지금까지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부터 새 부작용이 또다시 생겨났다. 이번에 찾아온 부작용은 어지러움이다. 이번 부작용은 나의 주치의 선생님 또한 긴장하고 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누워 있다 일어날 때 순간 휘청해서 넘어질 수도 있으니까.




어지러움을 덜어주는 새로운 약을 찾아야 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내가 가장 바라는 방향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것이지만, 그게 가능할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나는 요즘 어떤 행동을 할 때 굉장히 '조심히' 하고 있다. 특히 자세를 바꿀 때 그렇다. 예를 들면 앉아 있다가 일어설 때와 누워 있다가 일어날 때.


수면제는 나를 구해줬지만 그만큼 또 해치기도 한다. 그래서 요즘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약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내가 나를 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약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수면을 갈무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약을 평생 먹을 수는 없는 일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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