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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만남은 너무 어려워, 계획대로 되는 게 없어서

오페라 가르니에 현장 발권 후기

by 이진리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샤워를 하고. 청소를 하고 머리를 말린 후, 나는 곧바로 의자에 앉아 다이어리를 펼친다. 그리고 오늘 해야 할 일을 하나씩 적어 내려 간다. 내가 세우는 계획의 최대치는 일주일. 그러나 이마저도 가끔 길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선호하는 건 딱 하루치의 일정을 세우는 것이다.


한때는 '올해 내가 성취해야 할 것들'이라는 거창한 주제와 함께 신년을 맞이한 적도 있었으나, 그해에 나는 내가 생각보다 변덕스러운 사람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나는 왜 자꾸 다른 데 눈길이 가는가. 왜 자꾸 마음이 바뀌어서 계획을 중단하거나 방향성을 바꾸는가? 이러한 자기비판을 해보기도 했지만 내 정신 건강에 그리 좋지는 않아서 나는 그냥 나에게 주어진 하루를 성실히 살아가는 것으로 나의 시간을 최대한 빛내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나의 여행 스타일과도 아주 맞닿아 있다. 한 달 전부터 여행을 계획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인천공항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파리 미술관 입장권 상품을 찾아본 사람이다. 호텔과 가까운 오페라 가르니에는 당연히 갈 생각이었기에 고민 없이 입장권 구매 버튼을 눌렀는데 계속해서 결제가 거부되었다. 여러 번 시도해 봤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루브르 박물관 입장권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예약이 꽉 찬 것 같았다. 그래도 파리까지 가는데, 미술관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루브르와 오페라 가르니에를 동시에 포기해야 한다고? 하지만 루브르 측에 떼를 쓸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부랴부랴 다른 미술관들을 알아보기 시작했고 우선 오르세 미술관 입장권을 구매하는 데 성공했다.


파리에 도착해 거리를 걸을 때마다 눈에 보이는 커다랗고 화려한 건물. 오페라 가르니에를 볼 때마다 나는 늘 아쉬워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우박이 쏟아지던 어느 날. 우박을 피하려 눈에 보이는 건물 속으로 들어갔는데 그곳이 마침 오페라 가르니에 퇴장구 근처였다. 그러면 입장하는 곳도 이 근처에 있다는 건가? 고개를 쭉 빼고 까치발을 들고 사람들이 향해 가는 방향을 바라봤다. 멀지 않은 곳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게 보였다.


KakaoTalk_20250401_142708366.jpg 오페라 가르니에 미술관 입장구


세상에는 '역시'라는 것도 있지만 '혹시'라는 것도 있다. '혹시'라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입장구로 향하는 동안 '역시'를 계속해서 마음에 품고 있었다. 이미 실패했으니 또 실패해도 그렇게 속상하지는 않을 테니 정말 '혹시나' 싶어서 들러본 입장구에서 나는 현장 발권에 성공했다.


KakaoTalk_20250401_142708366_01.jpg 2024년 9월 12일 오페라 가르니에 현장 발권 티켓


원래 밥을 먹으려 갈 생각이었지만 지금 그게 문제인가. 심심하게 느껴지던 허기는 어디 가고 나는 아주 엄청 들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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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세 미술관도 그렇고, 오페라 가르니에도 그렇고. 파리의 미술관에서는 적어도 세 시간은 머무르게 되는 것 같다. 갔던 곳을 또 가기도 하고 봤던 곳을 또 보기도 하면서 나는 꽤 오랜 시간을 오페라 가르니에 구경하는 데 할애했다.




끝까지 루브르는 못 갔지만, 아예 안 아쉽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많이 아쉽지는 않다. 내가 다녀온 미술관들만으로도 프랑스 예술을 꽤 많이 수혈받고 느낌이다. 우버를 타고 오르세 미술관 앞까지 갔던 것 또한 생생한 경험으로 남아 있지만 우박을 피하려 언뜻 들어간 곳이 오페라 가르니에의 퇴장구였고 그래서 현장 발권을 시도해 들어간 오페라 가르니에는 나에게 선물이었다.


만약 내가 파리를 패키지로 갔다면 어땠을까? 무엇이든 착착 잘 진행되는 것 또한 또 다른 재미일 테지만 '첫 만남은 너무 어려워, 계획대로 되는 게 없어서'를 뛰어넘어 만난 설렘은 또 없지 않을까.




다음 유럽 여행지를 프랑스 소도시 스트라스부르-독일 쾰른으로 정한 게 불과 1개월 전. 그러나 한국 날씨가 다시 추워짐과 동시에 나는 스페인에 대한 호기심이 커졌다. 그게 불과 며칠 전인데, 오늘은 눈을 뜨자마자 동유럽이 생각났다. 특히 프라하와 비엔나. 동유럽은 서유럽에 비해 물가가 좀 저렴하다고 하니 그래도 덜 부담스럽게 다녀올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까지 하고 있다. (변덕이 이 정도 속도로 끓으니 1년 치 계획을 못 세울 수밖에.)



다음 여행을 어느 나라로 갈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우선 마음속으로 정해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현지인 및 다른 여행객과 어울려 보기. 그리고 국경을 넘어 가까운 나라로 넘어가 보기. 물론 이 다짐 또한 언제 어떻게 어느 시점에서 어느 방향으로 변화할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첫 만남은 너무 어렵고 계획대로 되는 게 없어도 우당탕탕 흘러가는 재미 또한 여행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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