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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행 비행기에 놔두고 온 것

by 이진리

n 년째 불면에 관련된 약을 복용해 오는 동안, 증상이 심해지면 약을 늘리고 증상이 완화되면 약을 줄이는 방향으로 나의 불편함을 달래 왔다.


내가 다니는 정신건강의학과는 길 한 번만 건너면 나온다. 증상이 갑자기 심해져서 예약일을 당기고 싶을 때는 병원에 전화해 예약일을 변경하곤 했다. 어려움이 생기면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가는, 비교적 편안한 방법으로 불면증과 n년째 동고동락해 왔다. 그래서 몰랐다. 19시간 가까이 되는 비행기 안에서 불면증이 덮쳐야 내가 그토록 끙끙 앓을 줄을.


인천공항에 도착해 티켓을 받고 짐을 부치고 기내 수화물 검사까지 끝내고 게이트 앞에 앉아 탑승을 기다리며, 나는 셀카를 한 장 찍었다.


KakaoTalk_20250404_142828296.jpg 이때만 해도 내가 비행기에서 그토록 괴로워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저 셀카를 찍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작년 9월은 코로나가 다시 기승을 부리던 때였다. 조심해야 할 시기에 여러 국적의 사람이 오가는 공항에 가야 하는 나를 보호해 줄 수 있는 건 마스크뿐이었다. 한동안 방치해 두었던 마스크 여러 개를 파우치에 챙긴 후, 집을 나섰었다.


그렇게 약 일주일 간의 짧은 여행을 즐긴 후, 다시 한국에 돌아왔을 때 어딘가 얼굴이 달라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내 얼굴이 이랬었나. 인상이 달라진 것 같은데 도대체 어느 부분이 때문인지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하던 어느 날.


이 사진을 다시 보게 되었을 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 눈에 아이홀이 생겼다는 것을.


아이홀, 그러니까 한 마디로 눈두덩이에 지방이 빠지며 선이 생긴 것이다. 눈두덩이에서 지방이 빠지는 이유는 뭘까? 이유를 검색해 보니, 나이가 들면서 일어나는 변화 중 하나라는 이야기가 참 많았다. 나도 서른이 넘었는데 얼굴에서 나이가 보일 만도 하지, 그런 생각을 했었다.


게다가 어떻게 생각하면 그동안 눈두덩이를 꽤 많이 혹사시킨 것에 비해서는 꽤 늦게 온 상황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살다 보면, 별로 내키지 않지만 참석해야 하는 자리가 있다. 그리고 불면증이 있는 나로서는 그 자리에 내가 어떤 상태로 참석하게 될지 알 수 없다. 잠을 제대로 못 자서 어지러움을 삼키듯 버티며 그 자리에 참석하게 될지, 아니면 그래도 어느 정도 숙면을 취했기에 말끔한 정신으로 가게 될지. 나는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이 없기에 내일을 점칠 수 없는 사람이다.


만약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참석한 자리에서는 눈에 힘을 꽉 주고 있는다. 피곤한 기색을 너무 쉽게 보이는 건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까. 안타깝게도 나는 어떤 약속 자리에 잠을 못 잔 채 나가는 일이 많았고 이 때문에 눈에 힘을 꽉 주고 있어야 하는 상황을 자주 맞았다. 어떻게 보면 그동안 버텨준 통통한 눈두덩이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눈두덩이의 지방이 아예 100% 다 빠진 건 아니다. 잠을 푹 잔 날의 아침에는 눈두덩이가 여전히 통통하다. 하지만 얼굴의 부기가 점점 빠져가면 빠져갈수록, 약 저녁쯤 되면 어김없이 눈 위에 선명한 선이 생긴다.


그리고 유럽여행 때 찍은 셀카를 비교해 보면 아, 이때부터 눈 위의 지방이 빠지기 시작했구나,라고 확신할 수 있다. 그때는 몰랐는데 말이다. 유럽으로 가는 그 비행기에 나는 그동안 잘 붙잡고 있던 눈두덩이 지방을 놓고 왔다. 불면증 환자로서 장거리 비행기는 탈 때마다... 뭐랄까... 거기에 수명을 조금 놓고 오는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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