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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혁 Jan 07. 2022

편견

a story of bias

누구나 편견이 있다.

그것을 부정적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난변수 time series에도 과거로부터의 continuous momentum의 기대치(통계적)에는 그 기대에 어긋나는 관찰(bias)들이 묻어 있기 마련이다. 그 어긋남은 유사 모델들의 평균 기대치를 baseline reference로 확보하면 관찰이 용이하기도 하다.




모두 까만 교복만 입던 시절에도 교복의 목 호크 속에 살짝 비추는 와이셔츠 칼라 색깔로 획일화된 검정 속에서 개성을 표현했었다.

여기서 검정 교복은 통계적 기대치이고, 교복 목에 살짝 비추게 입은 빨강, 파랑, 하얀 남방들은 나름 romantic 한 bias(검정으로부터의 편견들)로 관찰할 수 있다.


응용에서의 어려움은, 교복의 검정처럼 우세한 모멘텀을 하나의 모델에서 관찰하고 결정해야 하는 경우에 발생한다.


일 년 중 4개월은 검정 교복, 3개월은 파란 여름 교복, 주말과 방학중엔 울긋불긋 사복을 입는다고 일반화해보자. 제한된 1년 만의 관찰로 한 한생의 특정 색깔 군에 대한 편애나 선호도를 bias로 찾아야 하는 알고리즘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Baseline reference 없이 제한된 관찰로 최소 오차의 기대치와 그로부터의 bias(편견, 편애)를 축출 해 내야 하는 문제다.


편견(bias)은 통계적 특성이 있다. 다른 local 관찰에 비해 편견의 스팩트럼은 상대적으로 주파수가 저대역이거나 DC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인문적으로 표현한다면, 혼돈 속에 스스로만의 사유의 로칼 좌표에 일단 기준을 확보하면 '신념'이 되어 버린다. '신념'의 통계적 특성은 변화에 저항하는 invariance다. 철학자나 예술인에겐 신념이 사조로 진화하고, 과학자에게 신념은 증명을 유도하여 lemma를 만들고, 종교인에겐 '신앙'의 힘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이것을 주류에서 이탈한 bias로 본다면, 상황에 따라, 주류에 저항하는 counterproductive 한 outlier일 수도 있고, 주류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창조적 이탈일 수도 있다. 따라서 주파수가 있는 편견은 왜곡형의 부정적 (비열한) bias로 볼 수 있다. 필요에 따라 관찰을 왜곡하며 계속 바꾸는 경우이다.




폭풍 속에 항해를 할 때, 등대의 불빛을 향해  heading을 고정하지만, 거센 파도의 스웨이에 로칼 항로는 많은 경로 수정을 겪는다 (저밀도의 고주파 대역). 정해진 항로(주류; main stream 고밀도 저주파 대역)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한 일시적 변화로 볼 수 있다. 여기서 dominant momentum은 zero heading의 순연한 직진이고, 등대 방향으로의 베어링은 편견의 bias다. 조타수가 아닌, 창문 없는 엔진룸의 경험 많은 선원은 rudder의 실시간 각도 변호나, hydraulic actuator의 유압 변화 그리고 엔진의 rpm 정보만으로도 항로의 헤딩을 예측(blind prediction) 할 수 있다.

그 엔진룸 선원의 경험에서 얻은 '촉'을 알고리즘 모델로 대체해보려는 접근은, 그 '촉'에 대한 분석의 사유로 시작되어야 한다.




모든 것이 각기 고유의 주기들로 반복을 하면, 사람의 촉은 쉽게 그 개별 주기 들위 관찰로부터 피로를 느끼며, '단순화 작업'에 들어간다. 개별 주기들을 하나의  복합체로 round off 하려는 simplification의 본능이 작용한다.

수시로 바뀌는 배의 진행 뱡향, 하이드롤릭 유압과 배의 진행 속도 등을 하나의 유기체로 지각하려는 현상이다.

수학적으로는 tuplet 이상의 벡터 모델로 볼 수도 있다. 세 가지 요소 중 적어도 두 개가 독립되지 않은 유기적 복합 시스템의 trending model을 만들어 낸다.


(여기서 '유기적'이란, complex system이 자체 적응 능력을 지녔다는 의미로 인용했다.)


이 '단순화 작업'은 일종의 adaptation의 일부로 보인다. '촉'의 process 안에서 관찰된 trend는 늘 오차를 줄여가는 반복을 되풀이한다. 반복이 많아질수록 오차는 줄어들고, 궁극엔 허용 한계치로 수렴한다.

이것은 소위 달인이나 여느 프로급의 전문가들의 뇌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촉'의 유기적 현상이다.


복합체의 모델을 현실의 관측 공간으로의 투영(projection) 했을 때, 실체와 투영체(그림자, 디자인)와의 거리(오차)는 직교(orthogonal) 할 때 최소치가 된다.


i.e. 직각 삼각형의 빗변(실체)과 투영체(밑변)와의 수직 거리(직각 삼각형의 높이, 최소 오차)가 단순화된 2차원 모델이다.


현실의 오류는 직교에서 벗어난 각도만큼이고, 첫 번째 판단으로부터의 오류는 그 각도에서 직교 쪽으로 더 접근하며 줄어들며, 두 번째 판단의 오류 값을 낮춰준다.


최적 제어나 계측을 공부한 엔지니어들에게 잘 알려진 Orthogonal Principle과 상통한다.


실체를 그 투영으로 보는 것을 편견으로 생각해봤다. 편견과 실체는 곧게 바라본 수직거리에서 그 차이가 최소화된다. 현실의 편견은 필연의 현상이며, 이성적 투영은 편견의 오차를 local minima로 수렴하려 한다. 이 수렴 과정은 최적화를 위한 adaptation의 반복이다. 인문적 언어로 이것을 진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세상을 나만의 투영인 편견의 오차로 투영하고, 세상은 그들만의 투영인 편견들의 다양한 오차로 나를 그들만의 도메인에 투영한다. 이것은 하나의 오차가 또 다른 오차를 관찰하는 불확정성의 원리에 귀결된다. 우주에는 이 오차들의 비빔밥이 그릇 안에 담긴다. 그 그릇의 크기는 하이젠베르크의 constraint과 상통한다. 세상을 orthogonal 하게 관찰(투영) 할수록 우리는 실체에 근접한다.




나의 관찰이 옳고, 나의 감성이 합당하다고 확증하고 싶을 때, 나의 투영과 오차를 생각해보자. 옳다고 느끼는 확증의 순간은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자신의 오차가 실시간으로 요동치는 것을 순간 고정하는 오류다. 이 오류는 치명적이고 최적화의 진보는 영원히 불가능하다. 영원히 자신의 편견을 덮어 버리는 경우다. 물론 두 번째는 해탈한 부처의 경지다. 최적화의 오차가 zero로 수렴하는 경우다. 실체와 투영이 겹쳐진 경우다.

그러니까...

부처가 아니면서 부처 인척 하지 말고, 부처가 되고 싶지만 가슴만 더운 사람으로 살던지, 그것도 안되면 그냥 부처를 동경이라도 하며 살던지..  다른 모든 핑계는 유치함을 너머 야만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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