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와 편지가 이용되기 이전의 시대에는, 아쉬움과 갈망은 물리적 한계 앞에 아련했을 것이다. 아마도 가장 아름다운 상상의 구름들이 그 시대 사람들의 호르몬으로부터 뿜어 저 나왔을 것이고, 또한 그렇게 구름처럼 사라지고 잊혀 저 갔을 것이다. 그 시대는 헤겔의 미학 체계에서 '상징적 단계'의 아날로지로 볼 수도 있을 듯하다.
문자와 편지는 동시에 발명되었을 것이라는 학자들의 의견에, 나의 견해는, 편지를 위해 문자가 발명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편지는 통신의 채널이고 문자는 코드이기 때문이다. 통신공학 이론에선 채널에 따라 코딩의 설계가 바뀌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선 채널 후 코드가 개발의 순서다.
시쳇말에 "우리는 주파수가 맞는가?" "우리는 코드가 맞지 않는다"등의 표현들은 소통할 채널에 대한 존재적 의문들이다. 채널의 부재나 서로 다른 채널을 이용하려 할 때 코딩과 디코딩의 불일치가 발생한다. 일치되는 채널이 성립되면 코딩의 진화는 빠르게 문명의 꽃으로 수렴한다. 모든 언어의 표현들이 편지 위에 코딩되고, 디코딩되며, 의식의 1차 미적 반응들은 완벽한 fidelity를 추구한다. 이것을 나는 고전적 단계에 묶고 싶다.
편지의 3차원적 인식은 원거리 대화다. 굳이 high level schematic으로보자면, "delayed remote conversation" 정도의 표현이 될 수 있겠다.
그리움이 축지법을 쓰듯, 천리 먼 곳의 얼굴이란 의미의 천리면목(千里面目)은 편지의 또 다른 이름이다. 편지의 이런 기능성은 문명의 전반적 스펙트럼에 확장되었다. 그러나 첫 시작은 분명 낭만적 동기였으리라는 것이 나의 경험적 추론이다.
문명은 편지를 3차원을 너머 확장했다. 코드는 시대를 너머 미래의 미지로 배달된다. 학자들은 미래의 후학들을 위해 자신의 지식을 적은 편지를 썼고, 시인들은 그 시대의 정신을 자신의 코드로 편지를 미래로 보낸다. 우리는 흔히들 책이라 부르지만, 미래로 쓰는 4차원적 편지가 더 원초적 표현이 아닐까 한다.
의식 속의 영원불멸의 인식은 자신의 사후 부재에도 어떤 자신의 문명적 흔적을 코드로 남기려는 본능과 맞물려 작동한다. 종이 위의 기표들은 디지털의 자기 신호로 진화했고, 영원성에 대한 의식의 무한 욕망은 더 다양한 미디어 정보 형태들로 끝없이 변환을 반복한다.
이제 편지의 코딩은 기표와 공간의 경계를 벗어난다. 이 단계를 헤겔의 낭만적 단계로 볼 수 있을지는 관점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의미는 표현의 왜곡으로 증폭 될 수 있고, 악과 절망은 선과 희망을 대조 시키 위해 자유롭게 표현된다.
개인적으로, 편지를 가장 천재적으로 이용한 사람은 니체가 아닐까 한다. 당시 시대 윤리체계의 상징인 자라투스트라의 서사적 묘사는 미래의 독자를 위한 기발한 4차원적 편지였다고 생각한다. 그의 책이 그 시대에 디코딩이 난해하고, 거부감을 일으킨 건 니체도 이미 짐작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