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1의 "추측"을 실행하는 연산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공간 A에서의 관찰과 측정의 연산들이 정의된 기저 벡터들을 공간 B로 확장하여 측정을 적용하는 경우다. 공간 A의 약속(norm)들이 공간 B에서의 "추측" 연산에 "근거"를 제공한다. 이때의 추측은 예측(prediction)이 된다.
공간 A에서 "상징화"된 연산들이 공간 B의 "실제"에 적용된다. A의 상징들을 B의 실제에 투영(projection)하는 행위들을 "인문화 과정"의 수학적 아날로지로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고정된 의미들로 상징화된 기호 시스템이 정의된 공간 A와 실제계의 공간 B이다. 상징화된 언어의 공간 A를 실제계의 공간 B로 확장하는 과정들을 힐버트 연산들의 적용으로 생각해보자. A에서 상징화된 지식들의 근거(basis)로 추측한 B는 A의 투영(projection)이 된다. 투영은 B의 실수가 아닌, A와 B의 복소수적 복합체로 A의 시점으로 상징화된 B의 계측(estimation)이다.
뜬구름 잡는 듯한 이 작업의 현실성은 계측을 신뢰할 때 발생하는 “착각(오차)”이 최소가 되는 최적(optimal) 조건의 존재에 대한 보장의 공리(theorem)이다. 엔지니어가 “희망”을 갖고 최적의 “추축”을 해낼 수 있는 동기가 된다.
직교성(orthogonality);
힐버트는 이런 작업을 수학의 언어로 설명했다.
우주(힐버크 공간) 속의 많은 소우주(sub-space)들이 있다. A에서 B를 직접 가보지 않고도 최적의 “추측”을 하여 A에서 B를 그려 (projection) 낼 수 있으려면, 한 가지의 “필요충분”조건이 필요하다.
A에서 그린 B의 투영과의 오차가 B에 직교(orthogonal)하기만 하면 된다. 이 직교는 내적연산(Inner Product)과 관련한다.간단한 유클리드 공간의 예로, 만일 두 공간이 1차원이라면 A의 그림자가 B에 비칠 때 수직 (perpendicular)이면 된다. 두 직선 간의 최단은 수직 거리이기 때문이다.
이 노션을 힐버트공간에서 무한 확장을 하면, 복잡하지만 항상 풀릴 수 있는 문제가 된다.
공학의 “계측”은 가정 2의 난변수성을 다룬다. 현실에서 계측의 완벽성(zero error)은 명문화될 수 없지만 최소의 오차가 보장되는 "최적"이 명문화된다. 응용과학의 초월적 완벽성은 수렴이라는 사건의 과정 자체로 존재한다. 수렴의 궁극에 있는 최종의 특이점(singularity)은 유추되는 투사체일 뿐, 도달할 수 없는 힐버트 공간의 상태(state)로 종교나 신화의 영역에서 다뤄진다.
살다 보면 하기 싫은 일들,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나 상황들을 피할 수 없다. 부딛길 때의 오차(서로 간의 차이들)를 최적화한다면 서로의 상처를 방지할 순 없어도 최소화할 수 있게 된다.
나의 우주와 상대의 우주와의 차이가 직교한다는 의미는 무얼까? 서로에게 상처가 가장 적은 접근을 시도하는 것일 수 있다. 이런 "최적" 조건을 간과하면, 삶은 소위 "실패"를 경험케 해 준다. 실패란 오차가 주어진 조건에서 감당치(tolerance) 이상인 상황을 의미한다. 에너지 효율을 감안하는 삶을 추구한다면, 직교하는 최적점을 찾아야 한다.
누구나 다 아는 당연한 덕담 같지만, 직교성의 공리와 저변의 수학과 응용의 최적 계측 기술은 마하의 속도로 날아오는 미사일을 맞혀서 떨어트릴 만큼 정밀해질 수 있었다.
시인이 제한된 기호 시스템의 조합으로 무의식에서 비춘 실제계의 일부를 전달하려는 추측의 행위를 생각해보자. 훌륭한 작품들 속에선 오차를 최소화하는 직교성의 공리가 어떻게 응용되어진 걸까?직교성이란 수학적 상징성을 모르더라도, 시인은 그 공리를 타고난 언어 감각과 감성의 적용을 통해 실천한 게 된다.
예술 활동은 힐버트 공간의 근거(basis) 부재로도 "추측"의 연산을 실행한다. 이때의 근거(basis)들은 비인과적(anti-causal)이고, 힐버트 공간의 공리들은 성립하지 않는다. 종교적이거나 영적 체험들이 약한 경계조건(soft constraint)을 제공하며 실제계에 더 근접하는 공간을 유추할 수 있다.
이때의 추측 연산들은 예측(prediction)보단 예지(conjecture)로 볼 수 있다. 예지는 이미 경험론적 논거들을 벗어나기에 비과학적이거나 유사과학(pseudoscience)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이런 비힐버트 공간 (non-Hilbert space)으로의 이동이 수학에서 철학으로 사고의 확장이고, 더 큰 인문적 담론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