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사픽-오하이오 운하(Chesapeak-Ohio Canal, C & O Canal)는 1828년부터 건설하려 했던 당시로는 대규모 국책 인후라 사업이었다. 수도 워싱턴과 메릴랜드, 버지니아를 포함하는 체사픽만의 경제권을 펜실베이니아의 석탄과 철광석 자원과 연결하는 프로젝트였다. 운하는 워싱턴 DC의 북쪽, 조지타운에서 시작하여 포토맥 강의 중류를 지나 메릴랜드의 서북쪽 컴버랜드까지 22년의 공사 끝에 완공을 보았었다. 원래의 계획은 펜실베이니아의 내륙 철강도시 피츠버그(당시엔 오하이오)까지 연결하려 했지만, 1850년에 이미 볼티모어에서 피츠버그를 연결하는 증기기관차 노선(B & O Railroad)이 등장한 후였다. 운하의 운반량과 속도는 철도를 이길 수 없었다. 프로젝트는 컴버랜드에서 중단되었고, 운하는 철로운송의 보조수단으로 용도가 줄었다. 이후, 남북전쟁과 대홍수 등을 겪으며 운하는 회복 불능으로 파손되어 방치되었다. 1971년에 연방정부가 역사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면서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다.
당시 운하의 운반 동력은 말에 의존하였었다. 수로 옆에서 말들이 배를 끄는 구조로, 말들이 다니던 길을 토우패스(Towpath)라 부른다. 토우패스의 주변은 자생종의 플라타너스, 포플러, 은단풍 등의 나무들이 조림되었고, 대부분의 운하는 물 없이 유지되었다, 조지타운에서 북쪽으로 21번 수문까지의 구간들은 생태 공원이나 공원 조경의 목적으로 수로의 물을 남겨 뒀다. 이 구간이 나의 출퇴근 루트다.
국립공원이 된 운하와 토우패스는 지역의 유명한 산책로와 자전거길로 이용되고 있다. 토우패스는 여름과 가을에 대부분의 구간이 울창한 나무그늘에 가려져 있고, 한쪽은 포토맥 강을 끼고 있다. 강바람과 나무 그늘 길은 자전거 라이딩 길로는 최적의 조건이다. 토우패스는 아스팔트 포장을 하지 않고, 흙을 덮어 200여 년 전의길 상태를 그대로 보존했다. 옛날 시골 고향의 흙길을 달리 듯, 자전거 라이딩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결국 증기기관차의 위력을 과소평가한 19세기 초의 정책 비전은 22년이란 엄청난 공사기간과 예산의 낭비라는 오명을 얻었지만, 200년 후의 시민들에겐 약 300킬로의 아름다운 강변 산책로를 남겨 주었다.
2016년부터 2018년까지 여름과 가을의 주말에 구간별로 라이딩을 했었다, 조지 타운에서 컴버랜드까지의 토우패스 300 (km)를 5~60 (km)의 구간씩 나눠 왕복하며 종주를 했었다. 이후에도 주말에 산행보단 이 토우패스에 와서 조깅을 즐겼다. 끝없는 터널의 숲길에서의 모든 들숨들은 영혼을 세척했고, 몸을 단단하게 만들어 줬다.
2019년의 통근길은 21번 수문이 있는 풀스빌(Poolesville)의 롸일리스락(Rileys Lock)에서 포토맥강 하류의 남쪽으로 21 (km) 거리의 토우패스로, 출퇴근 왕복 거리는 약 42(km)고, 매주, 연구소의 아침 일정이 없는 이틀 정도를 자전거를 이용해 통근을 했었다.
자전거 통근은 이미 운동을 즐겨온 중년에게 생활 속 유산소 운동의 작은 실천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나 포토맥강과 토우패스의 여름과 가을의 풍광과의 교감들과 명상들은 깊은 영적 체험이었다. 페달질과 거친 숨소리에 익숙 해저 가는 육체가 영혼을 열어 주었다. 지나는 수풀들, 수로들 그리고 간혹 드러나는 포토맥강의 바람에는 이 길이 닦이던 18세기 중반의 에머슨과 소로의 초월적 관념들이 묻어 있는 듯했다. 버클리와 흄의 18세기 유럽이나 고향 파주의 추억 속 미루나무 시골길이 아닌 그냥 미국만의 풍광이다. 우리가 알던 광활한 프레이리나 텍사스의 미국이 아닌, 프로테스탄들이 소요하던 미국의 원모습이다.
평생 응용과학을 직업으로 살던 한 연구직 엔지니어에게 초월적 경험들은 놀라움이었다. 자연과의 교감이 주는 인식의 확장은 퇴근 후 취미로 읽던 인문서적들이 주는 결론적 관념들보다 흡수력이 강했다. 타자의 생각을 글로 읽는 것은, 그 사람의 의식과 사유의 제한된 단면이기에 지식은 피상적이고 학습은 기계처럼 수동적이다. 인공지능의 모태인 머신러닝도 정보를 미리 제공하는 지도 학습 (supervised learning)의 디자인은 유추된 함수의 적용 범위가 제한적이어서, 독서를 통한 지식의 확장과 아날로지로 볼 수도 있다.
자연과의 교감은 능동적인 학습이다. 지식은 선택되지 않고 펼쳐져 있다. 그리고 선택의 알고리즘도 없다. 흐름과 열림은 동시에 발생한다. 무엇을 배우려 하지 않았고, 배우려고 긴장하지도 않았고, 집중도 하지 않지만, 다석의 씨알 같은 무엇들이 알알이 영혼에 뿌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