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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혁 Feb 21. 2022

나목

MODEM 속에 오는 봄

1

이미 갈라져 쓰라린 속살을

칼바람이 더 깊숙이 저미어도

버둥데며 춤을 춘다


꽃바람이 아물게 해 주기 전까지는

살아 있다는 신호를 계속 전송한다


견딜만하다는 곱씹음의 떨림을 수신한다

쓰러져도 견딘 게 된 거라는 메시지를

입김으로 변조한 파켓에 밀봉한다


느리지만 먼길을 운반하는 낮은 주파수에

데워진 파켓을 싣고

삭풍의 채널을 가르며

안테나를 찾아 떠난다

 

안테나를 간신히 붙잡으면

복조 된 파켓은 그대의 속살에 쏟아진다

비트마다 담긴 입김들이 상처를 녹여준다


봄은

천천히

간신히

그러나

로버스트 한 모뎀의 성능처럼 확실하게

먼길을 날아온다



2

메시지가 먼길을 가려면 실어 나르는 운반 신호에 얹혀야 한다

운반 신호에 메시지를 싣는 것이 변조(modulation)고

도착한 운반 신호에서 메시지를 풀어서 꺼내는 것이 복조(demodulation)다

 

두 기능을 하는 문명의 도구가 모뎀(MOdulation and DEModulation, MODEM)이다


사르트르의 편지를 바람이 부는 개울 건너의 보부아르에게 던지려면

편지를 돌멩이나 활에 묶어 던지거나 쏘아 보낼 수 있다

도착한 돌멩이나 화살을 주은 보부아르는 묶인 편지를 풀어서 펼쳐 볼 수 있다


편지를 돌멩이나 화살에 묶는 것이 변조(modulation)고

받은 돌멩이나 화살에서 편지를 풀어서 펼쳐 보는 것이 복조(demodulation)다


큰 돌멩이나 화살은 여러 장의 편지를 한 번에 묶을 수 있지만

소르본느의 바깥으론 보낼 순 없다

작은 돌멩이나 작은 화살은 편지를 조금씩 묶을 수 있지만 파리의 구석구석에 도달할 수 있다


큰 돌멩이나 큰 화살은

FM처럼 고주파 라디오의 운송 신호다

작은 돌멩이나 작은 화살은

AM처럼 저주파 라디오의 운송 신호다

AM처럼 주파수가 작은 신호는 음질은 낮지만

멀고 높은 강과 산을 너머 수 있다


보부아르가 소르본느를 떠나 파의 변두리에 있다면

작고 가벼운 돌멩이들이나 화살들에 조금감아서 보내야 한다

느리지만 보부아르는 멀리서도 편지들을 받을 수 있다


커다란 돌멩이나 화살에 로켓을 달아서 주고받는 초고속 정보통신의 시대에 살아도

계절은 작고 느린 돌멩이나 화살처럼 조금씩 나눠져서 천천히 날아온다


어떤 조급함들

속도에 취한 떨림들

모든 애절함들에 아랑곳없이

봄은 늘 저주파의 모뎀을 통해

천천히 병든 실존의 속살들을 녹여준다


봄을 수신하려는 안테나들, 뒷마당의 나목들, Jan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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