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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함은 어디서 오는가

by 벨찬 Mar 27. 2025

엘리베이터 앞에서 아랫집 이웃님을 만났다. 부탁드리지도 않았는데 문을 잡아주시고, 우리 집 4층 버튼까지 눌러주셨다. 한 팔에 선이를 안고, 한 손에는 장바구니를 든 모습을 보셨나 보다. 감사 인사와 함께 요즘 아기가 자주 뛰어다녀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이웃님은 손사래를 치며 답하셨다.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고, 괜찮다고, 아기가 너무 예쁘다고. 곧 엘리베이터는 3층에 도착했고, 이웃님은 선이에게 인사를 건네며 내리셨다. 분명 거짓말이다. 그럴 리 없다. 어떤 날은 새벽 다섯 시도 되기 전에, 또 어떤 날은 밤 열 시가 넘어서까지 울리는 발망치 소리가 안 들릴 리가 없다. 아랫집 이웃님은 따뜻한 미소와 함께 새하얀 거짓말을 하셨다.

 

짧은 만남에서 따뜻함을 느낀 건, 이웃님이 나에게 다정했기 때문이다. 한 생성형 AI는 다정함을 이렇게 정의했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마음에 닿을 수 있도록 말과 행동으로 배려를 건네는 따뜻한 태도." 이웃님은 층간소음을 일으켜 죄송해하며, 아기가 말을 듣지 않아 어쩔 줄 몰라하는 아기 아빠의 마음을 헤아려주셨다. 그리고 자신의 말투와 눈빛, 몸짓을 사용해 그 마음속에 자리 잡은 죄스러움을 덜어주셨다. 문득,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다정함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궁금해져 SNS에 글을 올렸다. '다정함은 어디서 오는가.'

 

체력, 지능, 돈 등 다양한 댓글이 달렸다. 그중 눈길이 머문 답변에 생각을 덧붙여 보았다.

 

첫째, 다정함은 습관에서 나온다. 다정한 사람은 습관적으로 다정하다. 그들이 특별한 마음씨를 가졌기보다는 그들의 익숙한 몸짓에 다정함이 배어있다. 자주 "괜찮아?"라고 묻고, "고마워."라는 말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 그렇다. 남을 먼저 챙기고 자신을 마지막에 두는 행동의 순서가 몸에 밴 사람들은 대체로 다정하다. 다정함이 습관에서 나온다는 말은, 다정함이 연습 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말을 부드럽게 하는 연습, 말을 끊지 않는 연습, 상대의 의견을 묻는 연습, 불편함을 대신 짊어지는 연습. 의식적으로 시작했던 행동들이 점차 자연스러워지며, 우리는 서서히 다정해질 수 있다.

 

둘째, 다정함은 관찰에서 나온다. 다정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몸과 마음의 상태를 알아보고, 필요를 짐작해내는 능력이 필요하다. 평소와 다른 말투나 표정에서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읽어내는 것이 헤아림의 첫걸음이다. 흘겨보고 넘겨짚다 보면 오해하기 쉽다. 상대의 비언어적 표현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오래 바라봐야 한다.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나의 속마음을 알아봐 주는 사람에게 다정함을 느낀다. 그러니까, 다정함은 눈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셋째, 다정함은 마음의 여유에서 나온다. 돈과 시간이 많다고 해서 반드시 다정해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은 대체로 다정하다. 그리고 다정한 사람은 대체로 마음의 여유가 있다. 넉넉한 마음 한켠에 타인을 위한 자리를 비워두는 사람은 다정할 수 있다.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은 타인에게 건넨 온정을 되돌려 받으려 하지 않는다. 다만 세상 전체에 퍼진 따뜻함에 기쁨과 만족을 느낀다. 나만 괜찮은 게 아니라 너도 괜찮기를 바라는 마음, 그게 진정한 다정함의 모습이다.

 

넷째, 다정함은 경험에서 나온다. 다정함을 받아본 사람이 다정할 수 있다. 누군가 나에게 다정했을 때 느껴졌던 따뜻함이 좋아, 나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할 수 있다. 우리는 종종 줄줄이 연결되는 다정함을 경험한다. 앞사람이 잡고 있어 준 문을 지나며, 뒷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는 다정함 릴레이의 주자가 되어서. 자신이 속한 곳이 삭막하게 느껴진다면 다정함 릴레이의 첫 번째 주자가 되어보면 어떨까. 따뜻한 미소와 작은 인사 한마디로.

 

다정함은 특별한 재능이 아니다. 익숙한 말투와 몸짓, 타인을 바라보는 눈길과 마음의 여유, 그리고 받은 따뜻한 경험에서 비롯된다. 그렇게 스며든 다정함은 일상의 습관이 되고, 자연스레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진다. 아이가 그런 다정한 사람으로 자라길 바란다. 누군가에게서 받은 다정함을 기억하고, 또 누군가에게 건넬 줄 아는 아이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정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려 애쓰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 다정함을 충분히 경험해서 다른 사람에게 다정한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 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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