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린 송 감독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리뷰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로 진출한 셀린 송 감독의 데뷔작 '패스트 라이브즈'가 다양한 문화권의 관객들에게 생소하지만 아름다운 '인연'의 실타래를 풀어 나간다.
28일 '패스트 라이브즈'가 언론배급시사를 통해 공개됐다. 이 작품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국내 첫 상영됐으며, 미국 선댄스 영화제 상영 월드 프리미어 이후 각종 평단과 영화제에서 다수의 상을 수상하며 주목받았다. 한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남녀가 24년의 세월을 거쳐 다시 마주하게 되는, 묘한 인연을 담은 영화다.
24년 만에 마주한 어린 시절 첫 사랑…유태오·그레타 리 도전적 연기
'패스트 라이브즈'는 캐나다로 이민 간 나영(그레타 리)이 어린 시절 좋아했던 상대 해성(유태오)과 12년 만에 연락이 닿고, 24년 만에 만나게 되는 과정을 그렸다. 군대 전역 후 학업을 이어가는 해성은 나영과 미묘한 관계를 이어가지만, 나영은 멀리 떨어져 연락만 주고받는 상황을 끝내고자 한다. 이후 유대인 남편을 만나 결혼한 나영은 해성이 자신을 보러 뉴욕으로 온다는 연락을 받게 된다.
셀린 송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영화인 만큼, 그레타 리가 연기한 노라(나영)는 여러 면에서 전형적인 이민 여성의 고민이 묻어나는 일상을 그려낸다.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또 뉴욕으로 이주한 그는 자립하고 꿈을 이루어 나가고자 하는 욕망에 여념이 없다. 거의 잊어버린 한국 문화가 낯설지만, 한 편으로 여전히 스스로가 한국인이라고 느끼는 섬세한 감정과 순간을 포착해 낸다.
유태오는 한국 작품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던, 교포가 아닌 그야말로 한국인을 그려낸다. 해성은 한국에서 공부하고, 군복무를 하고, 중국으로 유학을 가며 전형적인 한국인의 삶을 살아간다. 문득 생각나는 첫사랑 나영의 소식이 궁금하지만, 현재의 삶을 중단하기는 어렵다. 뒤늦게 마주한 나영과 그의 남편 앞에서 그는 전생과 인연을 곱씹으며 복잡한 심경에 빠진다.
셀린 송 감독이 포착해 낸 '인연'의 순간…보편적 의미로 확장한 시도
'패스트 라이브즈'는 한국을 떠나 북미에 적응해 살아온 셀린 송의 시선, 현지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배우 그레타 리의 표현, 역시 타국에서 오래 거주해 온 유태오의 시선으로 한국을 담아낸다. 한국에서만 살아온 한국인이 보기에는 조금 어설픈 지점이 느껴질 수 있지만, 이 영화가 한국 영화가 아니라 미국 영화라는 점에서 충분히 이해가 가능하다. 독일에서 자라 교포 역을 주로 맡아온 유태오의 꽤 도전적인 시도를 만날 수 있다.
극 중 노라는 남편 아서를 만나 한국 사람들에겐 익숙한 '인연'의 개념을 읊는다. 처음 만나서도 어디선가 본 듯한, 옷깃만 스쳐도 전생에 무언가 있었다는, 8천 겁의 인연이 만나 부부가 된다는 아리송한 개념을 꽤나 눈에 보일 듯, 또 손에 잡힐 듯이 표현한다. 셀린 송 감독은 어쩌면 동양에서만 통용될 법한 인연의 개념을 보편성으로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무엇보다 해성과 나영이 12년 전 만나지 못한 이유에 한국인들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해성이 망설이는 이유가 한국적이라면, 나영이 자립에 그토록 고픈 데엔 이민자들의 입장이 반영됐다. 셀린 송 감독이 이 작은 영화 한 편으로 한국과 한국인들이 안고 있는 고민의 한 조각, 이민자들의 삶의 단면을 짚어냈다는 점이 놀랍다. 이번 생을 아쉽게 지나쳐보내며, 다음 생을 기약하는 두 사람의 얼굴에서 먹먹하면서도 충만한 여운을 깊게 느낄 수 있다. 3월 6일 국내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