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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랑 정원예술가 Feb 12. 2018

겸재와 이병연,왕유 시의도  

관포지교를 말한 60년간의 우정 

     위 그림,  왕유의 강산 설제도 


                                                                                                                       

藍谿白石出  玉川紅葉稀 
山路元無雨  空翠濕人衣
(남계백석출 옥천홍엽희 
 산로원무우 공취습인의)


쪽빛 계곡물에 하얀 돌 드러나고
옥빛 시내엔 붉은 낙엽 섞이었네 
산길에는 본래 비 내린 적 없는데
비취빛 산 기운 옷깃을 적시네


☞ 왕유(王維), <산중(山中)>                                


인용-  겸재 정선, 왕유의 시의도 연구를 위해 자료를 보관할 목적으로 아래 글과 그림을 인용한다                                                                                                                                  

http://m.blog.daum.net/sonsang4/13743362
일찍이 소식(蘇軾)은 <서언릉왕주부소화절지(書鄢陵王主簿所畵折枝)> 詩에서 '시서본일률'(詩畵本一律)이라고 했다. 시(詩)와 서(畵)가 본래부터 일사(一事)요, 일률(一律)임을 밝힌 것이다. 서(書)와 화(畵)는 근원적으로 같은 것(書畵同源)이요, 시(詩)와 서(畵)는 一事이고 一律이니 시(詩)와 화(畵)의 관계 또한 一律이고 一事일 수밖에 없다.

 이로부터 '시서화 일률론'(詩書畵 一律論)'이 형성되었고, 학문하는 선비들은 일신(一身)에 시서화(詩書畵)를 겸비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다. 이른바 '시서화 삼절(詩書畵 三絶)'이라는 말도 이렇게 생겨났다. 

                                                                                           

겸재 정선은  '사천 이병연(사천 李秉淵)'과의 관포지교(管鮑之交)로 유명하다. 이병연(李秉淵)은 1699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금화현감, 배천군수, 사복시 주부를 거쳐 정3품인 삼척부사(三陟府使)까지 올랐으며, 훗날 큰 시인(詩人)으로 성장하여 스승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의 뒤를 이어 동국진체 시단(東國眞體 詩壇)을 이끌면서 당대에 ' 시(詩)에서 이병연(李秉淵), 그림에서 정선(鄭敾) '으로 병칭(竝稱)되었던 인물이다.

두 사람은 스승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의 집을 사이에 두고 자라나 동문수학(同門修學)한 이래, 서로를 격려하며 각각 시(시)와 그림 분야에서 한 시대의 문화를 선도한 인물들인데, 겸재가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를 앞장서서 이끌고 완성한 인물이라면, 이병연(李秉淵)은 '영조실록(英祖實錄)'에 그 졸기(拙記)가 기록되었을 정도로 당대 진경시(眞景詩)의 거장이었고,

겸재가 무수한 작품을 남긴 정력적인 화가이었던 것 처럼, 이병연(李秉淵) 또한 무려 13,000수(首)가 넘는 한시(漢詩)를 남긴 부지런한 시인이었으며, 이병연이 겸재보다 5살 위였지만 늘 벗으로 자처했으며 각각 81세와 84세의 장수(長壽)를 누리면서 여느 사람의 한 평생이 넘는 60여 년 긴 세월 동안 시와 그림을 통하여 사귀었다. 두 사람의 우정이 얼마나 깊었는지는 1740년 초 가을에 겸재가 한강을 건너 양천현감(陽川縣監)으로 부임해 갈 때 이병연이 쓴 다음의 전별시(餞別詩)에 잘 나타나 있는데, 두 사람은 지척간의 이별조차 안타까워했을 정도이었다. 

爾我合爲王輞川     자네와 나를 합쳐놔야 왕망천(王輞川)이 될터인데   /   畵飛詩墜兩翩翩     그림 날고 시(詩) 떨어지니 양편이 다 허둥대네   /   己遠猶堪望        돌아가는 나귀 벌써 멀어졌지만 아직까지는 보이누나  /  炒愴江西落照川        강서(江西)에 지는 저 노을을 원망스레 바라보네      

왕망천(王輞川)은 당나라 시불(詩佛)인 왕유(왕維)를 말한다. 그리하여 이병연이 지은 다음의 시를 보면 한양에 있는 이병연이 시를 써 보내면, 양천(陽川)에 있는 겸재가 그림으로 화답하고, 겸재가 그림을 그려 보내면 이병연이 시(詩)로써 응(應)하자는 두 사람간의 약속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렇게 해서 이루어낸 시화첩(詩畵帖)이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에 전하고 있는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이다.             


그들은 서로 시화의 우정을 60년간 이어갔다                                                                                                                                

<여정겸재 유시거화내지약 기위왕복지시 (與鄭謙齋 有詩去畵來之約 期爲往復之始) ... 겸재 정선과 더불어 '시(詩)가 가면 그림 온다 '는 기약(期約)이 있어 약속대로 가고 오기를 시작하였다..........  

我詩君畵換相看   내 시와 자네 그림 서로 바꿔 볼 적에  /  輕重何言論價問   둘 사이 경중(輕重)을 어찌 값으로 따지겠나  /  詩出肝腸畵揮手  시(詩)는 간장(肝腸)에서 나오고 그림은 손으로 휘두르는 것  /  不知難易更誰難   모르겠네, 누가 쉽고 또 누가 어려운지 !>             


이병연이 시를 보내면 겸재가 그림을 그려 답하고, 겸재가 그림을 그려보내면, 이병연이 시로서 화답했다      

겸재의 목멱산 그림에 글로 답을 보낸 것이다. 


인용< 시의도의 중국  항성모에 대하여 >

아래, 블록식 산수화는 좀 특이하지만 남종화 이론에 근거해 자신이 완성한 산수화 스타일에 유명 당시(唐詩)의 본격적인 결합이란 점에서 이 그림은 명나라 후기에 새로운 유행의 기폭제가 됐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동기창 주변의 후배, 제자들은 이런 필치와 왕유 시를 접목하면서 유행 확산에 일조를 하고 있다. 예를 한 사람 들면 항성모(項聖謨, 1597-1658)가 있다. 

              항성모 <왕유시의도(王維詩意圖)> 1629년 지본수묵 28.1x29.4cm


항성모는 명대후기 최고의 수장가로 손꼽히던 항원변(項元汴, 1525-1590)의 손자이다. 명나라 때 정부 공인의 그림감정박사 칭호를 가지고 있었던 동기창과 항원변과는 많은 교류가 있었는데 그의 손자는 이런 인연인지, 동기창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손자 항성모(項聖謨, 1597-1658)가 그린 <왕유시의도>는 왕의 시「산거추명(山居秋明)」>의 한 구절 ‘밝은 달은 소나무 숲 사이를 비추고, 맑은 샘물은 돌 틈을 흐르네(明月松間照 淸泉石上流)를 가지고 그린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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