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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lleatriz Oct 16. 2023

공격방어균형과 미-중 전략경쟁

천하삼분찌개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속 “천하대세 분구필합 합구필분 (下大勢 分久必合 合久必分)”이라는 말처럼, 나뉨과 합쳐짐의 상태는 결국 독자가(혹은 분석가가) 어떻게 규정하는지에 따라 그 의미는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다. 즉, 공격방어이론(offense-defense theory)의 공격과 방어의 명시적 구분이 가능하기에는 매우 어렵다.

단일한 국가로 완전한(혹은 유일하게) 합쳐짐이 규정될 수 있다면(혹은 제갈량이 제시한 천하삼분지계가 완전한 합쳐짐으로 규정될 수 있다면), 과연 완전한 나뉨은 어느 정도로 분열되어야 그 격(格)을 가질 수 있을까? 춘추전국시대가 완전한 나뉨의 상태인가? 아니면 위진남북조시대가 완전한 나뉨의 상태인가?

구조주의의 안보딜레마를 보완할 수 있는 방안으로, 공격·방어의 균형 속에서 전략적인 선택을 취한다는 점은 그 한계성을 보인다. 무엇보다 Stephen Biddle의 논문 <Rebuilding the Foundation of Offense-Defense Theory>에서 언급한, 절대적 방어 우위를 점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고 제시된 핵(nuclear)이 과연 진정으로 방어적인지 재고(再考)해볼 필요가 있다.

히로시마(좌) 나가사키(우)

단적인 예시로, 1945년 2차 세계대전 당시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활용방식은 공격적 그 자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물론 냉전의 시기로 넘어와서는 대량살상에 대한 자정작용으로 핵을 방어적 용도(혹은 공업적 용도)로만 활용했다고 원용할 수도 있다.

흐루쇼프(좌), 케네디(우)

한편,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위기나 1983년 소련 발 우발적 핵전쟁이 일어날 뻔한 사례들은 핵이라는 무기가 절대적인(absolute) 방어용이라고 말하기에는 힘들다는 점을 반증한다.

공교롭게도 두 위기(crisis) 모두 내부의 정치적 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시험대에 오른 상황에서 발발했다. 각 사건(event)이 발발하기 직전의 맥락상 상황으로써, 전자의 경우 피그만 침공의 처참한 실패로 인해 쿠바가 공산화됨에 따라 존 F. 케네디는 집권 초기에 극심한 정치적 타격을 받았고, 후자의 경우 로널드 레이건의 ‘악의 제국’ 연설과 대한항공 007 격추 사건으로 인한 신냉전의 본격화로 인해 소련 내부의 긴장감은 점진적으로 고조되던 중이었다.

하물며, 상대방의 의도를 투명하게 파악하기 어려웠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전자는 미진한 기술력으로 핫라인이 미처 개통되지 않아 상대방의 의도를 쉬이 파악하기가 어려웠고, 후자는 당직을 서던 와중에 극히 제한된 정보를 가진 채 핵전쟁 개시여부를 떠안게 됐다.

공격방어균형론자가 강조하는 안보정책의 명징성이 안보딜레마를 해소할 수 있다는 기대와 달리, 당시 주요 안보정책이었던 상호확증파괴(Mutually Assured Destruction)와 상대방과 대치하는 (양극의) 이념이 철저히 작동됐다면, 그 결과는 파멸적이었을 것이다.

국가는 절대로 구조주의자가 상정하는 균질한 형태의 당구공이 아니다. 케네디를 필두로 한 참모진들이 소련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와 오랜 친분을 가지고 있던 주미전권대사와의 끊임없는 물밑작업이 없었다면. 그리고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 중령이 인공위성의 오인식으로 인한 미국 측 ICBM 발사 경보음을 축자적으로 받아들였다면. 결과는 역사가 흘러온 방향과는 상이하게 이어졌을 개연성이 높다. 무엇보다 냉전기간 동안 기술발전으로 설치한 핵공습경보(와 핵보복 알람)가(이) 무수히 울렸음에도, 한 번도 격발 된 적이 없었다는 점은 기술을 맹신하는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지 않을까?

페트로프 중령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The Man who Saved the World>

종국적으로, 제아무리 공격 우위와 방어 우위의 상황을 상정한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갈등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자 하는 행위자의 인식 틀과 결심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 분명한 점은, 과거 전권대사보다 약화된 권한을 가진 채 국가주의적 외교의 대변인에 준하는 오늘날의 전권대사는(모두가 그러하다는 것이 아니다) 이전보다 타국의 의도를 더 파악하기 힘들어졌다. 이는 안타깝게도 우리에게 <Dr. Strangelove>식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해진 것이지 않을까..?


분명 공격방어균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학자들(Charles Glaser, Chaim Kaufmann, Stephen van Evera, Stephen Biddle)이 짚어내는 지리적인 조임목(choke point)의 선점, 전구(theatre) 상의 수치화된 병력의 밀집도, 그리고 전술과 대형에 따른 개별 군사작전의 효용성을 통해 공수균형을 판단하는 것은 중요하다.

실제로 미중 전략경쟁에서 지리적 조임목이라 할 수 있는 싱가폴이 위치해있는 말라카 해협과 남중국해에서 '항행의 자유' 하에 지속적으로 이동하는 제7함대와 중국의 긴장관계는 인근주변국들에게 꾸준히 기민해지도록 만든다.

특히, 중국에게 남중국해는 곧 미서전쟁 당시의 카리브해를 바라보는 미국과 유사하다고 미어샤이머가 지적한 점은, 남중국해에서의 전략경쟁이 더 가시화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시사한다. (미국과 중국의 군사력을 수치화하는 보고서는 꾸준히 나오고 있다.)

하지만, 전쟁은 수치상의 일희일비가 아닌, 육참골단(肉斬骨斷)의 중요성을 인지한 채 전구상황을 파악해야 하는 현실이다. 과연 (이 경우 그들에게는 미시적인 단위라고 불릴 수 있는) 실제적인 전쟁의 참가자들에게 공격방어균형은 어떠한 적실성을 내려줄 수 있을까? 이러한 부분의 설명력을 가질수록 이론의 간결성(parsimony)과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는데 말이다.


장문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생각할 거리가 되기를 바라며.

F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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