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elleatriz Oct 11. 2023

Korea's Choice

B(irth)와 D(eath) 사이에는 C(hoice)가 있다

필자의 결론을 제시하기 전에, 역사는(다시 말해서 인생은) 무한히 되풀이한다는 마키아벨리적 역사관으로 이뤄지는 것도 아니고, 칸트 이후로 본격적으로 발아(發芽)한 계몽을 통한 무한한 수직적 진보 또한 인류가 달성하기 힘들다는 점을 짚어두고자 한다.(물론 물질적 풍요로움을 통한 개선만이 곧 진보라고 한다면, 이 글을 읽는 건 무의미해질 것이다.)

거대한 진자(Pendulum)가 움직이듯 끊임없는 반목(反目)과 화해 속에서 우리는 사회를 구성해 왔고,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만은 늘 잊지 않고 감각하고 있어야 한다. 인생 또한 돌이켜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평은 내릴 수 있지만, 그 당시의(혹은 지금의) 미약한 행위가 어떠한 큰 움직임을 일으킬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처럼, 우리는 부옇게 보이는 미래를 짚어 나가며 앞으로 걸어 나가야만 한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오늘날 우리나라 미디어에서 흔히 보이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역사는 반복된다’나 ‘신(新)-냉전’과 ‘사이버 안보’와 같은 반복되는 흐름 속에서의 오직 이 세대(혹은 시대)에서만 일어날 이슈들의 수사(rhetoric)는 분명. 반은 맞는 말이지만, 반은 틀린 말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역사는 패턴이 보일 수 있을 뿐, 이는 절대적인 법칙으로 발전(혹은 치환)될 수는 없다. 오늘날 우리에게 미디어를 통해 매일 격렬하게 다가오는 미중경쟁은 분명 도래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미래라는 가능성(potential) 속에서 존재하지도 않을 수 있다.

하물며 헨리 8세 재위 동안의 영국은 당시 주요 경쟁국이던 스페인에 거주하던 조선공들과 대포제조업자들을 비밀리 영입해 영국 전함을 신식으로 개선시킨 일화나, 이탈리아 공국들이 앞다투어 갈릴레이나 다 빈치와 같은 저명한 학자들을 영입해 성벽에 흙을 쌓거나 성채의 외양을 다각화(多角化)시킨 점은, 당대에 새로운 기술 접목은 곧 오늘날의 첨단안보와 대동소이했다는 점을 (첨단기술을 찬양하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특히) 잊어서는 안 된다.

한편, 자기실현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이라는 말처럼, 끊임없이 다시 반복될 경고와 위기를 강조하는 위협(threat)은 결국 대다수의 사고를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자기 스스로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자세는 위협만이 존재하는 인식의 토대 속에서(그리고 주변의 환경 속에서) 생장(生長)하기는 매우 힘들다. 민감해지고 예민해진 사고의 틀 속에서 누군가의 발화된 주장이 곧장 자신을 판단할 수 있는 권리를 얻지 않는 사실은 자연히 풍화(風化)된다.

역설적이지만 일상의 우스갯소리로 치부하는 이야기일지라도, 가장 격렬한(혹은 결정적인) 순간에서 발현되는 논리구조(algorithm)는 일상생활에 저변에 이식된 것에서 피어난다. 매일매일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위협에 대한 경고와 노출은(그리고 유쾌한 일상으로 대비되는 구미[歐美] 열강은) 너무나도 비약적이지만 결국 개인의 사고를 모퉁이로 몰아넣어 그 사고만을 하도록 강제하게 만들지 않을까?

(주변에서 본인은 [정작 <벚꽃동산(The Cherry Orchard)>의 트로피모프처럼 냉소적이면서] 현실주의적이라고 착각하면서는, 한국에서도 시도하고 느낄 수 있는 일상에서의 행동과 기쁨을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선망의(우상을 쳐다보는) 눈길을 보내는 모습을 바라보면 사뭇 웃프기도(?) 하다.)


이제는 어른이 될 때도 되었잖아요?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만한 나이가 되었어요. 그리고 당신 자신도 사랑에 빠질 수 있어야지요. 그래, 그래요! 당신은 순수하지 않아요. 결벽증에 걸린 거지요. 우스꽝스러운 괴짜에 얼간이 같아요. 사랑 같은 것에 초월해 있다고요? 당신은 사랑을 초월한 게 아니라, 피르스의 말처럼 덜떨어진 사람에 불과하다고요. 그 나이에 사랑하는 사람 하나 없다니..! - Olje Classics <안톤 체호프 4대 희곡>의 <벚꽃동산> 中



그렇다면 “우리는 미중패권 경쟁에서 어디를 골라야 할까?”와 같은 질문은 결국 선택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형벌에 처해지는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의 침대의 역설”에 처하게 만든다. 이승주 교수도 “경제・안보 넥서스(nexus)와 미중 전략 경쟁의 진화(2021)”에서 끝맺듯, 중진국 간의 협력을 도모하는 움직임은 어떠한 형식으로라도 취해져야만 한다고 필자 또한 생각한다. 다음 문제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프로크루스테스(좌) & 테세우스(우)

운이 좋았던 테세우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꼭 맞은 키를 가졌기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필자가 구체적인 답변과 대전략(Grand Strategy)을 (운이좋게도) 짤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추상적인 선에서만 답변을 할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아시아지역에서 한국과 국격이 거의 동일하다고 국제사회에서 평가받는 호주와, 삼성과 LG를 비롯한 국내기업들이 많이 진출해 있는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지금보다 더 밀접한 관계증진이 급선무이지 않을까 조심스레 톺아본다 (올해 초에 이뤄진 2023 한-태평양도서국 정상회의가 이러한 전략의 일환으로 이뤄진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한다.) 여기에 단순히 "극동"아시아 3국을 넘어 동남아시아까지 포괄해 "동"아시아를 조망할 수 있는 자세 또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더 긴 호흡의 연장선에서, 싱가포르・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호주와 오랜 기간 돈독한 관계를 가진 영국과의 (그리고 일본과의) 관계증진이 한국과 이뤄져야만 하지 않을까? 역설적이게도 한국은 다른 국가들에 비해 제국의 위치에 있었던 영국과의 큰 마찰이 존재하지 않는다.

한영(韓英) 양 국가의 새로운 관계발전은 현재의 딜레마를 해소할 수 있는 방안들 중 하나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도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무엇보다 몇 달 전 미국에서 유출된 기밀문서상에서 영국의 항공모함 배치가 계획되어 있었다는 점, 그리고 2021년 영국의 퀸 엘리자베스급 항공모함이 제주도 인근에 방문했던 점은 분명 필자의 주장과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던 사건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끝으로, 냉전 당시 ‘철의 장막’은 양극의 동맹국 간 어떠한 상호작용도 없었기에, 오히려 철저한 제로섬 게임이 가능했던 반면, 오늘날은 각자의 영역을 유지하는 가운데 상호작용을 유지하는 투과성 장막이 주(主)를 이룬다.

그렇다면 다원성을 핵심가치로 지향(志向)하는 “자유・평화・번영의 인도-태평양 전략”을 취하는 한국에게 있어서, 과연 다양성을 지양(止揚)하는 국가마저 어떻게 다양성으로 포용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자유주의라면, 다양성을 원하지 않는 자유마저 다양성으로 끌어안을 수 있을지는 매우 중요한 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딜레마 아닌 딜레마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결국 개인(Bottom-up)과 구조(Top-down)의 변화가 이뤄져야만 달성할 수 있지 않을까? 큰 배움을 추구하는 대학(大學)에서 수학의지가 넘치는 학생이 존재한다면, 그 의지를 길러낼 수 있도록 더 큰 배움을 추구하는 교수가 존재해야 하듯 말이다.


장문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생각할 거리가 되기를 바라며.


https://brunch.co.kr/@belleatriz/8


매거진의 이전글 '지역'은 국제정치를 설명하는 단위가 될 수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