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제시하자면, 지정학은 하나의 유의미한 가늠좌가 될 수 있다. <총, 균, 쇠> 저자 제러드 다이아몬드가 사람들에게 환경결정론자라 지탄받음에도, 우리 모두 지리(혹은 환경)가 거주민에게 던지는 함의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을 인지하듯,지정학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편, 지리적 중간국에게 있어 생존 이상의 무언가를 개진하기 위해서는 지정학에서만 멈춰있지 말아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강대국 역학 속에서의 아이러니(irony)는 지리적으로 요충지인 곳에서 발생하지만, 인재(人災)는 어디까지나 내심의 동인(動因)에서부터 시작한다.
무엇보다, 일차원적 정치 효용감을 끌어낼 수 있는 자극적인 갈등을 지양하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원용하는 바를 국제무대에서 가감 없이 달성되도록 노력해야만(반대로 그들이 구(舊) 외교라고 평가절하한 전통들을 복원(rehabilitate)시켜 국제사회(International Society) 내의 협력가능성을 강화시켜야만) 비로소 지리적 난제를 해소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노력의 과정으로, 비극(tragedy)을 아이러니로 받아들여 연민과 감정적 격양 상태로 보는 것이 아닌, 비(悲)-극(劇) 그 자체로 한발 멀리 떨어져 바라볼 수 있는 자세를 함양하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왜냐하면 우리가 비극과 대면하여 비로소 슬퍼하고 치유받음을 느끼게 해주는 카타르시스는. 내면의 응어리를 덜어내게 해줌과 동시에 비극과 조우하지 않기 위한 통찰과 생각거리를 던져주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마키아벨리적 가치가 일체 해소될 수는 없겠지만, 유연한 사고 함양을 통해 자연히 완화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차치하고, 지구가 존재하지 않으면 국제관계(International Relations) 자체가 존립할 수 없다는 명징한 사실을 망각한 채, COP27까지 이어지고 있는 선진국과 그 이외의 견제로 연이어지는 볼멘소리부터 해소하는 것이 급선무이지 않을까?
2015년 파리기후협약에서 지구 평균 온도 상승폭을 산업화 이전 대비 1.5°C 이내로 제한하고자 “노력을 다하기로” 합의한 약속은, 2017년 미국이 파리 기후협약을 자의적으로 탈퇴한 이후 그 의미가 무색하게 (2023년 기준) 5년 이내에 그 기준치를 깨는 수치가 (영구적인 현상이 아닐 것임에도) 나올 확률이 66%에 달한다는 보고서로 미뤄봤을 때, 진정한 의미의 글로벌질서(Global Order)란 무엇인지 아이켄베리(John Ikenberry)도 미드(Walter Russell Mead)도 반추해야만 하지 않을까..?
건축학적 지식과 예술적 소질이 넘친다고 자부해 오던 정원사가 본인이 만들었다고 자처하는 온실(Greenhouse)을 돌보지 않는다면, 과연 그를 정원사라고 평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공익광고가 던지는 함의가 현실이 그러하지 않기에 제시되는 것처럼, 양차대전 이후 포부 있게 원용한 신(新) 외교의 한 축이라 제시한 국제법이 스스로 무용함을 입증해 버린 꼴인데 말이다.
(물론 이러한 성문화된 법 속에서 명시적으로나 묵시적으로 드러난 역설을 시대상과 배합해 파악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한 점은 잊지 말아야 한다)
장문의 글을 읽어주셔서 미리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생각할 거리가 되기를 바라며.
Fine.
슈미트적(?) 아냐
분명 Stefan Auer가 "Carl Schmitt in the Kremlin: The Ukraine Crisis and the Return of Geopolitics"에서 강조하듯, 내부적으로 국가주의적 관념에서 탈피하고 협상과 이성적 대화(communicative rationality)로 문제를 해결해 온 EU의 안티테제(anti-thesis)로 부상한 제국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러시아와의 갈등관계는 곧 상보적이라고 짚어낸 점에 대해 유의해야 한다.
이에 “평화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폴리비오스(Polybius)의 격언처럼, Auer를 비롯한 Scott Feinstein과 Ellen Pirro도 EU의 역동적인 근육질 자유주의(active muscular liberalism)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유화적이고 평화에 침잠한 EU를 날 선 러시아가 기민하게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 일련의 평가과정(test)을 거치고 있기 때문이다.
2차 대전 당시 동부전선 최대의 격전지이자, 냉전 이후의 오늘날까지도 선진국들의 최대 격전지라는 점에서 비춰봤을 때 (격전지로서의 공(功)으로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는 UN초기 멤버로 들어왔다). 우크라이나는 서유럽 없는 어떠한 미래도 그리기 힘들지만, 서유럽에게 우크라이나 없는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자칫 승전 연합국(United Nations)의 파티로 시작된 UN의 정체성을 훼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내부 상황 지도 (2023년 6월 27일 기준) 출처:Wikipedia
무엇보다 브레진스키가 임종하기 직전에 짚어낸 4개의 격동지(우크라이나, 터키, 한반도, 아제르바이잔)는, 사후 6년이 지나 4개 지역 중 2곳에서 각각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과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전쟁 (이스라엘-하마스&헤즈볼라는 어떻게 될지 지켜봐야한다) 발발로 그의 예언이 전부 실현될 것만 같다.
그 예언이 착실히 실현되고 있는지의 여부를 떠나, 상기 지역(pillars)들은 오래전부터 지리적으로 매우 주요한 장소들이며, 동시에 인근 강대국들로 인해 격전이 으레 일어날 수밖에 없던 지역들이다. 그런 지역에 위치한 국가들일수록 유연성(flexibility)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가령, 한반도에 존재한 국가들은 과거부터 지리적으로 끼인 위치에서 주변 국가의 정세를 면밀하게 살펴야만 했다. 세종시기 황해(黃海) 인근까지 들끓던 왜구로 고심하던 명나라에서 일본을 정벌하러 나가겠다는 움직임을 취하는 와중, 조선은 명나라보다 먼저 본보기로써 이종무를 쓰시마 섬으로 파견해 그들을 정벌하도록 했다.
구조적 시각과 철저한 힘의 균형에서만 본다면, 단순히 강대국 명나라를 대신해 조선이 대리전(proxy war)을 펼쳐 일본을 토벌했다고 분석이 끝날 수 있다. 이런 설명은 결론으로 내달려가 결말만을 제시할 뿐, 어떠한 통찰을 얻을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린(나아가 역사는) 어디까지나 황혼의 투쟁(Twilight Struggle) 속에서 언젠가는 도래할 여명이 올 때까지 걸어가야 한다.
당시 신생국이던 조선은 강대국 명나라로 인해 반강제적으로 일본과의 전쟁에 돌입해 국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거니와, 동시에 조선은 일본 막부 측에도 꾸준히 서신을 보내 쓰시마 섬의 왜구만 토벌한다는 점을 일관되고 꾸준하게 강조하며 확전을 미연에 방지했다.
그 결과 조선은 쓰시마 섬만을 타격할 수 있었다. 명나라로부터 신생국가 조선이 호의적이라는 인상을 남김과 동시에, 일본 본토 측에도 꾸준히 왜구를 소탕하라는 언질(nudge)을 줌으로써, 조선은 일거양득의 효과를 누렸다. 하물며 (학자들 간의 논의는 다르지만) 국제관계적으로 명나라의 지지를 받아 이는 4군 6진의 개척으로 이어져, 오늘날 우리가 인지하는 한반도의 형상을 가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