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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lleatriz Nov 03. 2023

황금사과는 건네져야만 한다

절이 싫어도 주지스님은 떠날 수 없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경영관리(Management)라는 단어는 본디, 손을 지칭하는 라틴어 ‘Manus’와 고삐를 가지고 말을 조정한다는 이탈리아어 ‘Maneggiare’의 의미를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 즉, 달리는 말안장 위에서 손으로 고삐를 “어떻게” 쥐고 달려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지칭하는 것이다.

승마교관이 초심자에게 늘 말하는 “고삐를 짧게 쥐되 당기지 말라”는, 중요한 건 어떠한 운동(안장에 앉아 균형을 잡는 것)과 흐름(말이 달리는 것)에 대한 지각에 대한 맥락 속에서의 실천치(prudence)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게 중요한 국제관계학(International Relations)의 입장과 같은 선 상에 있음을 반증한다.

이런 맥락에서 탈냉전기 중견국가에게 중요한 자질이라 언급된 촉매자(catalyst)로서 외교적 이니셔티브 행사나, 촉진자(facilitator)로서 의제 설정 및 지지 연합 구축이나, 관리자(manager)로서 국제제도 수립을 지원하는 역할 수행은 곧. ‘무엇’을 ‘어떻게’ “완급조절”할지 결단하는 것이 선결과제이다.

가령, 러우전쟁에서 서방의 러시아 제재 움직임과 불협화음을 내고 있는 BRICS(와 그 가입예정국들) 같은 경합국가들(Swing States)의 연합체의 잠재성이 크다고 평가받으면서, 그 실현 가능성에 대해 박한 평가를 내리는 주된 이유도, (지금까지는) 환경과 같은 거시적인 이슈들에 대한 느슨한 연합만이 명시적으로 보일 뿐, 어떠한 대원칙에 기반한 관리법은 아직까지 제시되지는 않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견국은 택일(擇一)의 순간이 다가오면, 그 전략적 자율성은 매우 제한되는데, 그렇다면 과연 한국은 어떤 종류의 고삐를 어떻게 쥐어야 할 것인가? 익히 강대국으로 알려진 국가들의 입장이 복합적으로 가미된 상황에서 한국이 목소리를 내야 할 순간에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 말이다.

분명 대통령실에서 근래에 발발한 이스라엘-하마스 분쟁에 한국이 국내 경제 및 안보영향에 대한 전반적인 점검을 개시할 것이라 발언한 이후, 별도의 입장을 표명하지 않은 점은 헤징(hedging)의 연장선으로 볼 수도 있다. 석유와 같은 천연자원이 나오지 않는 한국 특성상, 이러한 전략(strategy)은 지극히 합리적(reasonable)이기 때문이다.

중동지역의 이해관계 당사자가 아닌 한국과 달리 실질적인 주요 당사국인 강대국들의 경우, 그들의 주장을 명시적으로 원용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사우디 아라비아의 관계개선으로 인도-사우디-이스라엘-유럽-미국을 이은 경제회랑을 실현시키고 싶은 미국(나아가 역외균형으로서 본토 밖의 지역에 군사적 개입을 점진적으로 줄이기를 바라기에)은 군사적 개입을 지양한 채 군비 차원에서의 지원만 유지하고 있다.

중국은 (중국 내부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대한 표리부동(表裏不同)적인 입장이 중동지역에 흘러 들어가지 않게 만들기 위해) 이슬람 국가들의 편에 언제나 서있었다는 점을 적극 강조하며 중동국가들과의 연대를 강조하는 중이다. 나아가 미국에 반대되는 주장(anti-thesis)을 원용해 실효성이 발생하게 되면, 미국으로부터의 외교적 협상도 이끌어낼 수 있을 가능성 또한 존재하기에, 일련의 전략은 그들에게 무차별하다.

한편, 동아시아에서 한국은 어떠한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지형적 측면에서 한국이 위치한 동아시아도 메뚜기보다 비황(locust)이 주류로 존재하기 더 적합한 지형을 지니고 있다. 민족주의에 기반한 국가주의적이며 냉전 시대의 사고관이 아직까지 진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메뚜기들은 특정 밀도 이상이 되면(즉 임계전환점을 지나면) 비황으로 변신해(즉 더 활성화된 두뇌와 공격성을 지닌 채) 이곳저곳을 떠돌며 황해(蝗害)를 일으킨다. 마치 이것처럼, 대략 3~4세대가 미시적으로 전혀 다른 물질적 환경과 사고의 배경을 지닌다고 믿음에도, 거시적으로는 미완(未完)의 서사구조의 연장선 상에서 살아가고 있기에, 개인과 집단 사이의 역학(reaction)은 거의 흡사해지고 있으며, 일정한 주기를 이뤄 특정 국가들에 강한 거부감을 표하고 있다.

버트런드 러셀(Betrand Russell)은 개인의 사적(private) 공간이 비좁아질수록, 불안감은 커지고 예민해지기에 일정거리를 띄운 채 살기를 제언한다. 물론 절이 싫다면 중(衆)은 떠날 수야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육지는 (아직) 인간의 힘으로 옮길 수 없다 (그리고 주지스님은 절을 버리고 떠날 수가 없다).

당장에 (다수가 자기 예언적으로 믿고 있는) 미국과 중국 사이의 양자택일의 압박 속에서, 전자에 좀 더 편중된 선택을 취할 신호(signal)를 보내는 한국이 (높은 확률로) 쥐고 있는 고삐는 “산업의 쌀”이라고 칭할 수 있는 반도체와 자동차 산업이 있다. 그리고 한국의 상기 산업들 다수가 동맹국들끼리 핵심 기술의 공유 및 공급망 구축의 일환으로 우방-쇼어링을 준비하고 있다.

이러한 관리법은 좋은 방안들 중 하나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파리스가 황금사과를 세 여신들 중에 그 누구에게도 주지 않는 결정을 내릴지라도, 트로이 전쟁(Trojan War)이 발발하지 않았을 것이라 단정 지을 수 없는 것처럼. 선택의 순간에 결정을 회피하는 건 곧, 의무는 저버린 채 권리만을 체리피킹(cherry-picking)하겠다는 것과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이미 조강지처 오이노네가 곁에 있던 파리스가 직접 모험을 떠나 지브롤터 해협 인근에서 황금사과를 따왔다면, 아프로디테를 고르는 선택은 지양했으리라 짐작해 본다.)

그럼에도, 중견국으로서 호주의 외교를 본받아 우리도 어떠한 대원칙을 가지고 행동해야만 한다는 주장이 존재하는데, 아쉽게도 호주의 전략을 곧이곧대로 차용하기에는 애로사항이 많다. (오히려 그들이 어떠한 지성체계를 가지고 외교에 임하는지를 본받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호주는 한국과 달리 동남아시아의 역외자와 같은 지리적 위치에 존재하고 있고, 미국과 "영국"이라는 두 개의 동맹축이 공존하고 있다. 물론 그 ‘대원칙’이 두 개의 축이 존재하기에 가능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들이 아니었다면, 중견국이라는 위상은 달성되못했을 수도 있는 법이다.

지향하는 삶의 실현이나 '대원칙'이 달성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점은 유연한 사고와 남탓하지 않는 자세, 그리고 역설(paradox)을 기회로 삼을 수 있는 기개(virtue)와 상상력(imagination)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러한 논의의 연장선 상에서 다변화를 통한 기회의 모색은 반드시 이뤄져야만 한다.)

운(Fortuna)이 변수로써 작용하기에 불가항력이라 피력할 수 있지만. 본디 운은 인간의 기개를 꺾어버리기 위해 장난(혹은 시련)을 치는(주는) 존재가 아닌, 본인의 의무를 다한 사람들에게 가장 친절하게 미소를 짓는 존재이니 말이다.


장문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생각할 거리가 되기를 바라며.

Fine.


https://brunch.co.kr/@belleatriz/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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